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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55] 사라지는 추억의 名所

바람아님 2018. 1. 25. 08:59
조선일보 2018.01.23. 03:12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15년 이상 이화(梨花)인의 사랑을 받아온 '이화사랑'이 결국 문을 닫았다. 교수인 나야 그저 가끔씩 들러 참치 김밥 한 줄 사 들고 나오는 게 고작이었지만 학생들에게는 '군내 나는' 아지트였는데 영원히 사라져버리니 왠지 짠하다. 세상 모든 게 어쩔 수 없이 경제 논리에 의해 영락(榮落)을 겪기 마련이지만, 마치 1970년대 대학 교정으로 밀고 들어오던 탱크들처럼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캠퍼스로 진군하고 있다.


2016년이 저물던 무렵 서울대 교정에 있던 '솔밭식당'도 함께 스러졌다.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서울대에 볼일이 있어 간 김에 혼자 언덕을 걸어 올라 솔밭식당을 찾았다. 11월이라 야외에 앉을 수 없어 섭섭했지만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따뜻한 소고기국밥 한 그릇을 시켜 국물째 들이켰다. 사흘이 멀다 하고 점심때마다 솔밭에 앉아 대학원생들과 함께 먹던 열무국수가 그립다.


익숙한 곳들이 자꾸 사라진다. 익숙한 곳이 사라지면 그곳에서 만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함께 아스라해진다. 그 옛날 솔밭식당에 가면 나처럼 허름한 음식을 좋아하는 다른 과 교수들을 만난다. 밥값이 몇 푼 되지 않아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이 다른 테이블 밥값까지 내고 간다. 저만치 먼저 가면서 꾸벅하는 인사가 돈 다 냈으니 맛있게 드시고 가라는 인사였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런 추억이 말간 국물에 흐느적거리는 흰 국수가락처럼 아리다.


세상이 통째로 치매를 앓는 것 같다. 나는 한곳에 그대로 서 있는데 주변이 자꾸 떨어져 나간다. 이러다 언젠가 나도 기억에서 사라질 걸 생각하면 적이 음울하다. 차라리 스스로 치매라도 앓아야 아스라한 추억 속에 남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아직 '학림다방'이 남아 있다. 그냥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 전에는 '학림커피'라는 이름의 2호점을 냈단다. 부슬부슬 눈발이 날리면 오랜만에 대학로로 마실이나 가볼까?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