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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53] TV와 책

바람아님 2018. 1. 10. 10:31
조선일보 2018.01.09. 03:13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출판업계는 늘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란다. 책 읽는 인구가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극장을 방불케 하는 초대형 TV가 거의 모든 가정의 거실을 점령했다. 그 거대한 화면 가득 막장 드라마를 띄워 놓고 엄마 아빠는 아이더러 "넌 왜 책을 안 읽냐?"며 나무란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마다하고 고리타분한 책을 펼칠 아이가 솔직히 몇이나 될까? 부모가 먼저 책을 읽어야 아이도 따라 읽는다. 우리 집 거실엔 아예 TV가 없다.


TV와 책은 앙숙(怏宿)이다. 이제는 스마트폰까지 합류해 독서욕을 말살하고 있다. 지하철마다 책 읽는 사람 천지였던 일본도 스마트폰에 무릎을 꿇었다. 책은 정녕 이대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문명의 근본이 책이었는데. 나는 이쯤 해서 너무 늦기 전에 TV가 책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앙숙이라니까 진짜 그런 줄 알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지 말고 TV가 책을 살려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새로운 문화의 주역이라 자처하려면 책을 밀어낼 게 아니라 책과 함께 가야 한다.


적어도 KBS·MBC·EBS 세 공영 방송만큼은 적극적으로 TV 책 프로그램을 부활해야 한다. 패널 몇 사람이 삥 둘러앉아 주례사 덕담이나 늘어놓는, 그런 판에 박은 프로그램 말고 책을 읽고 싶어 못 견디게 만드는 기발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연예 프로그램에는 새롭고 매력 넘치는 기획이 그야말로 사흘이 멀다 하고 대밭에 죽순처럼 솟아오르고 있건만, 고작 '교양할당제'로 제작한 책 프로그램은 한결같이 구태를 벗지 못한다.


그렇게 마지못해 기획한 프로그램은 이내 시청률 저조로 말미암아 점점 더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대로 밀렸다가 슬며시 멸종하고 만다. 장안의 고수(高手)들이 이마를 맞대면 TV 책 프로그램을 멸종위기종 목록에서 구출해낼 묘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TV와 책이 앙숙이 아니라 단짝이 되는 걸 보고 싶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