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5.01. 00:53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
우리의 인식공간을 결박했던
이념의 말뚝을 벗겨낸 선언이자
단군 이래 최고의 드라마였다
1950년 7월 20일, 예천 대마리(里)에 살던 당시 8세 권주필은 집 마당에 들어선 인민군 장군이 무서웠다. 장군은 백마를 외양간에 묶고 대청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한 시간 후, 부모와 얘기를 끝내고 나온 장군은 소년 권주필을 불러 무릎에 앉히곤 손톱을 깎아줬다. ‘공부 잘해라’. 이 말을 남기고 홀홀히 백마를 타고 떠난 그는 작은아버지였다. 2005년 언론인 평양 방문 때 작은아버지를 찾았으나 전쟁 포연과 사라졌다고 했다. 나의 부모는 땅에 묻힌 지 오래, 노환이 찾아온 장모는 전쟁 시(詩)를 남기고 와병 중이다.
“그 날, 우리들은/
뿔뿔이 목숨, 제 몫의 목숨들이/
산산조각 났다/
…/
허우적거리던 날/
포성은 터지고/
…/
청춘은,
꿈은,
죽음처럼 눕게 했다/
전쟁, 그 전쟁은”(추은희, ‘그날 이후 1’). 이게 어디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뿐이랴.
1940년,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받은 작가 김사량은 해방을 맞아 고향인 평양으로 귀환했고, 전쟁 때 할 수 없이 종군작가로 남하했다. 무정이 이끄는 2군단 문화선전부 지휘관이었다. 지리산까지 내려간 그는 9월 중순 미군 인천상륙 때 퇴각하다 원주 치악산에서 병사했다. 조선총독부 전매국장을 지낸 그의 친형은 서울 종로 낙산에서 9월 말 인민군에게 잡혀 납북됐다. 형은 북상해 죽고, 동생은 남하해 죽었다.
그러나 정전둥이 맏형 격인 문재인 대통령의 한마디는 그 세대 빚을 청산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우리가 사는 땅, 하늘, 바다 어디에서도 서로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코 뒤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저렇게 늠름한 세대의 대변자를 보지 못했다. 4강의 강력한 견제 속에서 뚝심을 잃지 않는 저렇게 유별난 ‘한반도 운전자’를 보지 못했다. 그는 사문화된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의 차가운 비석에 묘목을 꽂아 꽃을 틔웠다. 화무십일홍, 벌과 나비가 잉잉거려야 열매를 맺는 법, 정전이 종전이 되고, 대결이 평화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김정은을 불러내 평화 로드맵을 그린 판문점 드라마는 단군 이래 최대의 쾌거다.
의구심도 피어난다. 여행은 시작됐지만 길은 희미하다. 장사꾼 기질이 충만한 트럼프를 달래고, 대범한 척 주판알 튕기는 시진핑을 설득하는 길이 어디 쉬우랴. 한몫 끼려 틈새만 노리는 일본과, 전리품에 눈독 들이는 러시아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이 어디 쉬우랴만,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한민족의 결속 앞에서 누가 무슨 훈수를 두고, 누가 감히 앞길을 막을 수 있을까.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 -이 엄청난 선언은 우리의 인식공간을 결박했던 이념의 말뚝을 뽑아 낸다. 남한의 아사달과 북한의 아사녀가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손잡고 노래할 시간을 열었다.
보수 진영의 화살이 맵기는 하지만, 제발 이 역사적 국가 대사에 동참하기를 고대한다. ‘완전한 핵폐기’는 북·미 정상회담 몫이다. 핵폐기 북·미 담판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이 판문점 선언의 최고치라면, 남북 두 정상은 일단 ‘시대적 소명’을 천명한 것이다. 되돌아가는 길은 차단됐다. 오직 ‘종전입니다!’를 향한 길이 뚫려 있을 뿐이다. 두 정상의 합창이 8000만 민족 전체의 코러스로 울려 퍼질 그날, 정전 직후 태어난 나도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부기] 권주필께 소 값 물어내라 했다가 접수증이 없어 실패했다. 대신 아들 주례 서 주고 술만 얻어먹었다. 병상에 누운 장모는 TV에 등장한 김정은을 보고 눈물지었다. ‘우리가 다 치렀다’는 세대의 메시지가 뺨에 흘렀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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