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LG 임직원 전체 특강을 한 적이 있다. 1시간 반에 걸친 강연에서 나는 왜 LG가 죽었다 깨어나도 삼성을 이길 수 없는지에 대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 얼마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에 LG 로고를 달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일 등을 예로 들며 선뜻 저지르지 못하는 소심함과 어딘지 모를 2% 부족함에 대해 난타를 퍼부었다.
강연을 끝내고 맨 앞줄에 앉아 계신 구본무 회장님께 다가가 인사를 드렸는데 회장님은 뜻밖에도 내게 시간 여유가 있으면 회장실에서 차 한잔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날 나는 거의 1시간가량 회장님과 번갈아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밤섬의 새들과 자연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기업 회장님이라기보다 동네 복덕방 영감님 같았다.
국립생태원장 시절에는 회장님 초청으로 화담숲에서 저녁을 함께한 적이 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밤에도 회장님은 말씀으로 내게 그 어떤 가르침도 주시지 않았다. 그저 편안하게 세상 얘기를 나눠 주셨을 뿐이다. 내 책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에서 밝힌 대로 난생처음으로 CEO가 된 내게는 몇 분의 롤 모델이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닮고 싶어 했고 실제로 흉내 낸 모델이 바로 구본무 회장님이었다.
나의 '경영 십계명'의 상당수가 구 회장님을 지켜보며 배운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삶의 업보'라고까지 얘기한 소통을 위해 개발한 '원·격·바(원장이 격주로 구워주는 바비큐)' 역시 회장님께 얻은 지혜다. 무사히 원장 일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뒤 마치 스승님을 찾아뵙는 마음으로 회장실에 연락을 드렸다가 거의 잡상인 취급을 당하는 바람에 포기했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시다니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어딘지 쪼끔 촌스러우셨던 회장님과 달리 최근 LG의 가전제품들과 광고는 날로 세련미를 더하고 있다. 당장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도 경영'의 신념을 꺾지 않으셨던 회장님의 유산이 드디어 빛을 보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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