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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73] 갑질과 갑티

바람아님 2018. 5. 30. 07:04
조선일보 2018.05.29. 03:1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이라 제법 갑질을 많이 하며 산다. 출판계약서에는 저자가 갑이고 출판사가 을이라 적혀 있다. 계약 관계의 주도권을 지닌 쪽을 갑, 그 반대편을 을로 적는 게 관행이라지만 사실 출판사가 저자라고 예우해줘서 그렇지 저자가 대놓고 갑질을 해댈 수 있는 계제는 결코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갑질이 도를 넘는다 싶더니 급기야 한 재벌 총수 가족의 비행이 국민적 분노의 뇌관을 건드렸다. 그러나 가진 자의 갑질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던가?


우리 사회에는 유달리 위아래를 구분하고 수치로 줄을 세우는 '갑을 문화'가 팽배해 있다. 나보다 덜 가졌거나 아래라고 판단되면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저질 문화가 있다.

국립생태원장으로 일하던 시절 조회 시간에 나는 딱 한 번 작심하고 직원들을 겁박한 적이 있다. 누구든 정규직이랍시고 비정규직 직원에게 갑질을 하다가 발각되면 그 즉시 해고하고 나도 사표를 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에서 부시먼(Bushman)을 연구한 캐나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 교수의 일화다. 그 지역에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하려 족장에게 선물을 했단다. 그런데 선물을 받는 족장의 표정이 영 떨떠름하더란다.

그 후 마을의 다른 사람 집을 방문할 때마다 똑같은 물건이 있는 걸 보고서야 선물이 맘에 들지 않아 그랬구나 생각했단다. 실상은 딴판이었다. 부시먼 문화에서는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걸 혼자 소유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란다. 그래서 선물을 받으면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계속 남에게 건네준단다.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남보다 많이 움켜쥔 건 자랑이 아니라 수치다. 물론 남보다 열심히 일해 정당하게 얻은 부와 특권이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열심히 한다고 무조건 잘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세상일에는 필연 못지않게 우연도 중요하다. 갑질은 물론 갑티를 내는 것조차 부끄러워해야 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