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7.17. 01:11
트럼프의 유럽 순방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 아닌 추종자
한·미 동맹 맹신론 벗어나
자체 방위·외교 역량 키워야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인 트럼프는 백악관 주인이 되면서 ‘건설자(builder)’에서 ‘파괴자(destroyer)’로 변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70여 년간 유지돼 온 국제질서를 파괴하기 위해 대통령이 된 듯한 느낌이다. 파리 기후변화협약 탈퇴, 이란 핵협정 탈퇴, 유엔인권이사회 탈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자유무역 질서 파괴…. ‘아메리카 퍼스트’란 황금 로고가 찍힌 그의 외교 장부에는 ‘업적’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이번 순방을 지켜본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트럼프에게 ‘최고 훼방꾼(disrupter-in-chief)’이란 별명을 선사했다. 트럼프 외교의 다른 이름은 ‘반달리즘(vandalism) 외교’다.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는 동맹국 정상들에게 방위비 즉각 증액을 요구했다. 2024년까지 GDP(국내총생산)의 2%(지난해 미국은 3.5%) 수준으로 국방비를 늘리기로 한 약속을 당장 이행하지 않으면 미국은 나토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윽박질렀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4% 증액안’을 불쑥 던질 때는 트럼프의 수행원들조차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나토가 ‘쓸모없는 동맹’이고, 유럽의 안보 무임승차가 불만스럽더라도 친구를 그렇게 막 대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러시아에 천연가스를 의존하고 있는 독일에 트럼프는 ‘러시아의 포로’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최고의 우방이자 동맹인 영국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되 유럽 단일시장에는 남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택한 테리사 메이 총리에 대한 불만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소프트 브렉시트에 반발해 사임한 메이의 정적(政敵),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에 대해서는 ‘훌륭한 총리감’이라고 치켜세웠다. 노골적인 내정간섭이고, 메이에 대한 모욕이다.
트럼프의 레킹볼 외교 덕분에 한반도 정세가 극적인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역설이면서 아이러니다.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 전개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지부진한 북한의 비핵화 속도에 대한 인내가 한계에 이르는 시점이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군사 옵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 선언’을 내세워 반대할 게 뻔하다. 화가 난 트럼프가 한·미 동맹 파기 카드로 한국을 압박할 수도 있다.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한 북한과 동맹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도 상정 가능하다.
오스트리아 빈 소재 자유주의전략센터 회장인 이반 크라스테브는 며칠 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트럼프에게 중요한 건 친구가 아니라 팬(fan)이라고 꼬집었다.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보면 친구, 즉 동맹은 책임과 예측 가능성, 상호주의를 요구하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란 것이다. 자신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손뼉 치고 따르는 추종자가 필요하지 동맹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이란 친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유럽은 대비할 때가 됐다고 크라스테브는 강조한다. 대미(對美) 의존에서 벗어나 자체 방위력을 키우고, 유럽국들끼리 단합하고, 어느 정도 불가측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트럼프가 한·미 동맹을 흔드는 사태에 우리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 첫걸음은 한·미 동맹 맹신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스스로 방위 역량을 키우고, 남북관계를 전략적 지렛대로 활용하는 외교 역량도 중요하다. 그것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의 레킹볼 외교에 대비하는 길이다.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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