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18.07.23. 21:41
정암 조광조. 17세 때 김굉필의 유배지로 찾아가 공부를 했다. 30세가 되도록 소학만 읽은 김굉필. 지행합일(知行合一)에 관한 한 그를 따를 사람은 드물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조광조는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선비였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조광조를 두고 한 말이다. 주초는 조(趙)의 파자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사림의 반대편에 선 훈구파.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 네 자를 써 벌레가 파먹도록 한 뒤 “역모”라고 외쳤다. 역적으로 낙인찍힌 조광조. 능주로 귀양 가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았다. 그때 나이 37세. 많은 사림이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중종 14년,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다.
왕은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을 믿은 걸까. 믿었다면 우매하고, 믿지 않았다면 교활하다. 왜? 사약을 내렸으니.
이후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선조 2년, 1569년 3월4일 퇴계 이황이 선조에게 남긴 마지막 말. “무오사화, 갑자사화는 말할 것도 없고, 기묘사화 때 현인군자는 모두 큰 죄를 입었사옵니다. 이로부터 사(邪)와 정(正)은 한데 섞여 간악한 무리가 때를 만나 원한을 갚을 때에는 ‘기묘의 여습’이라 하옵니다. … 북로남왜는 다투려 하고, 백성은 쪼들리고, 나라의 부고(府庫)는 비었으니 사변이 일어난다면 토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흩어질 것이옵니다.”
상대를 제거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정치. 당쟁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 정치로 백성의 배를 불릴까, 나라를 지킬까. 썩은 패정(悖政)이다. 23년 뒤 임진왜란이 터지고, 왜란이 끝나고 29년 뒤에는 정묘호란, 또 9년 뒤에는 병자호란이 터졌다. ‘기묘의 여습’은 백성을 잡아먹었다.
기무사 문건 사건. “쿠데타 음모”, “내란 음모”, “반역죄”라는 말이 난무한다.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조국 민정수석. 대통령은 인도 방문 중 특별수사를 지시했다. 군령권을 지닌 국방장관은 아예 없다.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배제하고, 직접 “계엄령 관련 문서와 보고서를 모두 즉시 제출하라”고 했다. 특별수사단을 믿지 못한 걸까, 청와대가 전면에 나섰다. 67쪽짜리 ‘대비계획 세부자료’의 내용을 발췌해 발표했다. 합동참모본부가 2년마다 만드는 200~300쪽짜리 계엄실무편람과는 다르다고 했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문건을 모두 공개하지 않았으니. 왜 공개하지 않을까.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듯한 청와대. 그것이 민주주의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사건이라면 더더욱 사실에 입각해 시시비비를 따져야 하는 것 아닌가.
관련자는 오히려 담담하다. 한민구 전 국방장관, “문건 작성은 작년 2월 국방부 회의에서 논의됐는데, 그런 공식 회의석상에서 쿠데타를 논의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조현천 전 기무사 사령관은 관련 문서를 “1년 동안 존안(存案)자료로 보관하라”고 했다고 한다. 내란·쿠데타를 기도했다면 자료 보관을 지시했을 리 있겠느냐고도 한다.이런 말도 나온다. “군이 국가혼란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옳다는 말이냐.” 감사원장의 말, “통상의 방법으로 치안유지가 어려운 상황을 예상해 대처를 검토한 것이라면 별문제가 없다.” 3월16일 기무사령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뒤 6월28일까지 석 달여 동안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송영무 국방장관.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이해되는 면도 없지 않다. 물론 기무사 문건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란”, “반역”이라고 소리치는 정치권. 주초위왕이 어른거린다. 이런 물음을 던져 본다. 국군은 반역 집단인가. 아니다. 많은 군인은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하다. ‘나라 지키는’ 충견을 늑대로 포장해선 안 된다. 이념·정치적 판단을 앞세우기 전에 사실의 토대 위에 시시비비를 차분히 따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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