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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76] 맹장

바람아님 2013. 11. 14. 21:31

(출처-조선일보 2010.09.13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얼마 전 건강종합검진을 받으며 나도 모르게 맹장염을 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해보니 맹장의 벽이 두툼해졌고 그 안에 액체가 고여 있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간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 신세를 서너 차례 졌는데 아마 그런 도중에 맹장염을 앓은 모양이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닌 듯싶어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맹장은 포유동물의 초기 진화 과정에서 영양가가 낮은 식물성 먹이를 분해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그러다가 영장류가 진화하며 주식이 과일과 곤충으로 바뀌면서 서서히 퇴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도 토끼를 비롯한 많은 초식동물들은 잘 발달된 기능성 맹장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을 포함한 많은 포유동물에서는 이른바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쓸모도 없는 맹장은 왜 깨끗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맹장염이라는 증상이 맹장의 운명을 보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가늘고 길게 퇴화한 맹장의 돌기는 일단 감염으로 붓기 시작하면 혈액 공급이 차단되어 금방 곪아 터진다. 그래서 맹장의 돌기는 자연선택 과정에서 너무 가늘지 않게 어느 정도의 굵기를 유지하며 우리들 중 몇몇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게끔 진화한 것이다. 자연선택은 제법 우리의 건강을 걱정해주기는커녕 당장 주어진 문제에 코를 박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과정이다.

맹장과 맹장염의 관계에 대해 이같이 역설적이면서도 명쾌한 진화적 설명을 제시한 학자는 바로 우리말로도 번역된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의 저자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이다. 그가 지난 9월 8일 84세의 삶을 마감했다. 내가 병원에서 맹장염 상담을 받으며 그의 이론을 떠올리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지난해 '다윈의 해'를 맞아 나는 세계적인 다윈학자들을 찾아가 대담을 나눴다. 윌리엄스는 내가 제일 먼저 연락한 학자였으나 이미 알츠하이머병이 깊어 지인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이 집단이 아니라 개체 또는 유전자 수준에서 벌어지는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준 20세기 최고의 진화생물학자였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그의 설명에서 출발한다. 세계진화생물학계는 또 한 분의 큰 스승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