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박소령의 올댓 비즈니스] 기업 리더도 문장 갈고 닦는 소설가처럼

바람아님 2018. 8. 26. 06:48

(조선일보 2018.08.25 박소령 스타트업 퍼블리 대표)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박소령 스타트업 퍼블리 대표박소령 스타트업 퍼블리 대표


"작가가 되려면 '자신이 이거다 하고 정한 대상과 전면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

그 코미트먼트(commitment)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방향성이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깊이'는 꼭 필요해요. 깊이가 없으면, 나아가 그 깊이를

끝까지 짊어질 담력이 없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요. 나머지는 운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논픽션·에세이·번역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중이지만, 예순을 넘긴 후 나온 책 몇 권은

비즈니스 카테고리에 포함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2011년 작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2015년 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대표적이고 올여름 한국어판으로 나온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도

이 계보에 속한다.


1976년생 소설가 겸 배우, 가와카미 미에코가 질문하고 1949년생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이 책은,

2015년 하루와 2017년 3일, 총 4일 동안 진행된 기나긴 대화가 전부다.

하루키 팬이라면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열어보는 마음으로 읽으면 되고, 하루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의 인생관과 직업관을 듣노라면 지금 나는 어디쯤 서 있는지 위치 감각을 가지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 문학동네 펴냄/ 2018.08.01/  358 p
835-ㄱ185ㅅ/ [정독]어문학족보실/ [강서]3층 어문학실


하루키는 좋은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설명한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이 책을 읽으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신뢰 관계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 때문에 하루키는 매일 열 장씩 글을 쓰고, 군살을 찌우지 않고, 옷을 단정히 다려 입고,

칼날을 갈듯 문체를 갈고 닦는다.

기업의 성장을 책임지는 리더의 역할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후기에서 하루키는 헤밍웨이의 말을 인용하여 따분하고 재미없는 질문에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적는다.

그러면서 가와카미의 신선하고 끈기 어린 질문에 공을 돌린다.

가와카미는 하루키 작품의 독자를 "재미있는 것을 찾으러 밖에 나가는 게 아니라, 여기 가면 중요한 장소로 돌아올 수

있다고 느끼는" 내적 감각이 강한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 표현한다.

손뼉을 치게 만드는 정확한 문장이 가지는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만,

하루키 말대로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