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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통계의 유혹

바람아님 2018. 8. 29. 10:32

중앙일보 2018.08.28. 00:13

 

통계 숫자 마음에 안 든다고
통계청장 바꾸는 것은
체중 늘었다고 저울 바꾸는 꼴
통계 오류는 정책 실패로 귀결
통계의 중립성 보장돼야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불신의 시대에도 숫자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여전하다. 통계 수치를 많이 인용하면 토론에서 유리하다. 말과 글도 그렇다. 통계 숫자에 근거한 주장일수록 설득력을 갖는다. 한국의 빈곤율·실업률·자살률·출산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통계와 비교한 뒤 “그래서 한국은 ‘헬조선’이다”고 주장하면 반박하기 힘들어진다. 숫자에 따라 한 나라가 지옥도 될 수 있고, 천국도 될 수 있다. 숫자의 힘이고 통계의 마력이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빅토리아 황금기의 대영제국을 이끌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말이다. 국정 책임자가 느끼는 통계의 유혹에 대한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들린다. 모든 정부는 장밋빛 통계를 기대한다. 통계 수치가 잘 나와야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고, 재집권에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 결과를 분식하거나 입맛에 맞는 수치만 골라 현실을 가리거나 왜곡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심지어 조작까지 한다.


“바보들만 중국의 통계를 믿는다”는 말이 있었다. 중국 각 성(省)이 집계한 지역내총생산(GRDP)을 모두 합하면 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보다 많았다. 개선되고 있다지만 중국 지방정부의 통계 숫자 뻥튀기는 구조적이다. 숫자가 잘 나와야 지방정부 책임자는 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더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다. 『중국의 부채 만리장성(China’s Great Wall of Debt)』을 쓴 디니 맥마흔은 통계 조작이 성행하는 중국을 ‘블랙박스’로 표현했다.


통계 조작은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려 국가부도 같은 대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스가 그랬다. 그리스는 2000년 유로존(유럽 단일 통화권)에 가입하기 위해 통계에 손댔다. 가입 기준에 맞춰 재정적자 규모를 GDP의 6%로 낮춰 발표했다. 실제로는 13.6%였다. 2009년 더는 숨길 수 없는 상황에서 집권한 사회당 정부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과거 정권의 재정통계는 엉터리였다”고 실토했다. 그리스의 신용등급은 강등됐고, 국채 값은 폭락했다. 국가부도는 예정된 코스였다.

배명복칼럼
문재인 정부가 통계청장을 전격 교체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소득주도 성장 정책에도 불구하고 올 1, 2분기 소득분배지표가 연속 악화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뒷말이 나온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1, 2분기 소득은 한 해 전보다 각각 8%, 7.6% 급감해 1분위와 5분위(최상위 20%) 가구 간 소득 격차가 사상 최대로 벌어졌다. 청와대는 부인하고 있지만 정부의 정책 방향에 주파수를 맞추지 못한 ‘정무 감각’ 부재가 경질 배경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더구나 후임 청장으로 임명된 강신욱 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분석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해 소득주도 성장에 힘을 실어준 사람이다.


통계청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청장 교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정부 입맛에 맞는 통계 지표를 적극 발굴하거나 안 좋은 통계 수치는 적당히 ‘마사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을까. 앞으로 고용이나 소득, 분배 지표가 호전된 것으로 나온다면 사람들이 그걸 액면 그대로 믿어줄까. 통계 오류는 필연적으로 정책 실패로 이어진다. 통계청은 중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소중한 국가 인프라다. 통계 수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통계청장을 바꾸는 것은 계산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계산기를 박살 내고, 몸무게 늘었다고 체중계를 바꾸는 꼴이다.


청와대 입장도 이해는 된다. 시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간판 정책을 뒤집긴 어려울 것이다. 좀 더 지켜볼 시간도 안 주고 ‘실패’라고 몰아붙이는 야당과 보수언론이 야속하기도 할 것이다. 지지율은 급락해 50%를 향하고 있다. 더 밀리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청와대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정면돌파를 선언했을 것이다. 여기서 유턴하면 정책 동력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은 지지층마저 등을 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최저임금 제도 자체에는 죄가 없다. 전 세계 150여 개국이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대선 당시 임기 내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은 다수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 문제는 완급 조절이다. 업종과 지역을 막론하고 2년 새 29% 인상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정책도 과속하면 탈이 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의 최저임금 인상 속도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서울 명동과 전라남도의 수용 여력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게 랜들 존스 IMF 한국담당관의 얘기다. “통계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들이 통계를 이용할 뿐이다.” 통계학계의 오랜 잠언이다.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