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9.05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상대의 말을 중간에 뚝뚝 끊는 것도 폭력
자주 분노할수록 심장 질환 확률도 높아
의사소통의 기본 규칙은 '순서 주고받기'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마감에 쫓겨 원고를 쓰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된다.
원고를 보내고 '또 하나를 해냈구나'하는 만족감은 동네 목욕탕의 뜨거운 욕조에서 확인된다.
최근 내 '목욕탕의 기쁨'이 완전히 망가졌다.
어느 순간부터 같은 시간대에 꼭 만나게 되는 한 인간 때문이다.
등 전체와 팔뚝에 용 문신, 호랑이 문신이 가득하다. 그러나 몸집 자체는 조폭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전혀 근육이 없다. 그저 헐렁한 지방뿐이다. 그 인간이 매번 욕탕을 오가며 '섀도복싱'을 한다. 참 많이 덜렁거린다.
주먹 나가는 속도는 '턱도 없다!' 그런데도 입으로는 '쉭, 쉭' 거리며 바람을 가른다.
내가 견디지 못해 목욕탕에서 먼저 나와 몸을 닦고 있으면 그 인간도 곧 따라나와 옆에서 몸을 말린다.
아, 헤어드라이기로 꼭 그 부분을 말린다. 무척 '느끼는 표정'으로 한참을 말린다. 물론 그 쾌감은 나도 안다.
그러나 공중목욕탕에서 절대 그러는 거 아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목욕탕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관심 없다.
나만 열 받아 어쩔 줄 모른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이따위 '섀도 복싱맨'으로 인해 내 삶의 평화는 아주 자주 망가졌다.
나는 사소한 일에 매번 분노했다. 내 분노는 타인의 공격성을 정당화했을 뿐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나처럼 '욱'하며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사람이 아주 많다.
'A유형(A-type)'이라 불리는 인간들이다. 혈액형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미국의 심장 전문의였던 프리드먼은 유난히 성격 급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화를 자주 내며,
스트레스를 잘 받는 사람들을 가리켜 'A유형'이라 이름을 붙였다.
프리드먼이 'A유형'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이었다.
자신의 병원 대기실 의자가 계속 망가져서 가구업자에게 수리를 부탁했다.
가구업자는 프리드먼 병원의 가구가 참 특이하다고 했다. 보통은 의자의 등받이 쪽 천이 헐어 있는데, 프
리드먼 병원의 의자는 손잡이와 의자의 앞쪽 천이 다 헐어 있다는 것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프리드먼은 자신의 병원 환자들이 특이하게 앉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대부분은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대지 못했다. 다들 조급하여 의자 끝자락에 엉덩이를 겨우 걸쳐 앉아 있었다.
수시로 팔걸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의 말 중간에 끊는 것은 폭력이다!' /그림=김정운
프리드먼은 강한 성취욕, 정확성,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인간들은 대부분 'A유형'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같은 'A유형'의 인간들은 관상동맥 질환에 걸릴 확률이 타인들에 비해 7배가 높다는 것도 확인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능력'있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 'A유형'의 인간들이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가면 '아까운 사람이 너무 일찍 갔다'며 그렇게들 아쉬워했던 거다.
오늘날 프리드먼의 연구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된다.
다양한 형태의 인간 성격을 'A유형'과 그 반대의 'B유형'으로 그렇게 쉽게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A유형'과 관련하여 수없이 반복된 연구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분노와 심장 질환과의 관계다.
자주 분노하면 심장 계통 질환에 걸릴 확률이 확실히 높아진다는 거다.
확실한 게 또 하나 있다. 쉽게 분노하는 'A유형' 사람은 남의 말을 중간에 자주 끊는다.
말이 느리거나 자신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아주 못 견뎌 한다.
답답한 나머지 '열 받아'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고 스스로 요약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사람 정말 많다.
'일 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일수록 더 그런다. 그들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한국 사회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사람들의 세상은 지났다. 오늘날에는 남의 말 중간에 뚝뚝 끊는 것도 폭언이며 폭력이다.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서 주고받기(turn-taking)'다.
타인의 '순서(turn)'를 기다릴 수 있어야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인간의 의사소통 방식이 다른 포유류와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순서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는 바로 이 '순서 주고받기'를 제일 먼저 가르친다.
엄마가 인형 뒤에 숨었다가 갑자기 '우르르 까꿍'하며 나타나는 놀이는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문화에서 발견된다.
아기가 '까르르' 웃을 때까지 엄마는 기다린다. 이제 엄마가 인형 뒤에 숨으면 아기는 조용해진다.
엄마가 다시 '우르르 까꿍'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아기는 '내 순서'와 '타인의 순서'를 지키는 인간 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규칙을 익힌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타인의 순서를 인정하고 기다릴 줄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방에서 '욱'하는 이유는 '성취'와 '경쟁'의 규칙들로만 지내온 세월 때문이다.
세계 10위권의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 규칙인 '순서 주고받기'는 여전히 무시하고 살고 있다.
자신의 '순서'를 빼앗긴 상대방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는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온 '순서 주고받기'라는 의사소통의 근본 규칙을 회복하지 않으면 이 분노의 악순환으로부터
결코 헤어날 수 없다. 조금만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면 그렇게까지 '욱'할 일은 별로 없다.
그 덜렁거리는 '섀도 복싱맨'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드라이기로 '애먼 곳'을 말리는 그 행동에 대해서는 언젠가 꼭 이야기해야 한다.
그건 정말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전혀 열 받지 않고,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부탁'할 수 있을 때, 그때 가만히 이야기할 거다.
당분간 그 목욕탕의 드라이기는 안 쓴다. 젖은 머리는 수건으로만 말려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열 받으면 무조건 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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