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8.25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의 근대탐험] 엽서첩 '펜화 스케치 경성의 근대미'
그 시절 그 더위에 피서는 한강 백사장으로 아낙네들은 빨래를 했고
사라진 한강인도교
6·25 발발 사흘만에 폭파된 비극의 다리
위령비 꼭 세워지길 꼭 한강다리 주변에
노들섬 백사장에서 뻗어나온 한강인도교와 나룻배를 타고 노니는 남녀,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그
려진 그림엽서. 왼쪽 위에 ‘경성 한강인도교’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이 다리는 6·25 발발 사흘 만에 한국 정부에 의해 폭파됐다. /김시덕 제공
폭염의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휴가 다녀오신 독자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한다.
식민지 시대에서 20세기 후기 사이의 서울 사람들은 한강 백사장이나, 강동 지역의 뚝섬 유원지,
인천 월미도 해수욕장 등에서 피서를 즐겼다.
당시에는 한강 백사장이나 뚝섬 유원지도 '한강 해수욕장'이나 '뚝섬 해수욕장'이라 부르고는 했다.
1985년에 평양을 방문한 남한 기자들이 북한 주민에게 해수욕 다녀왔느냐고 묻자 그 주민이 묘향산으로
해수욕 다녀왔다고 답해서 남한 사람들이 비웃은 일이 있다.
하지만 1985년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가까운 과거에는 서울 사람들도 한강에서 피서하는 것을 해수욕이라고 불렀다.
사람은 참 간단하게도 과거 일을 잊어버리곤 한다.
한강 해수욕장은 오늘날의 동부이촌동에서, 식민지 시대에는 중지도(中之島)라 불린 노들섬 사이에 펼쳐진 '
한강 백사장'을 가리킨다. 1960년대 말에 한강 개발이 본격화되고 1971년에 중산층을 입주 대상으로 삼은
한강맨션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오늘날의 동부이촌동에서 노들섬까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분들도 많으실 터. 서울 시민들은 한강 백사장의 남쪽 끝인 노들섬에서, 여름에는 피서와 낚시를 즐기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
표지에 ‘펜화 스케치 경성의 근대미’라고 적힌 그림엽서첩.
20세기 초 경성의 풍경들이 담겨 있다. /김시덕 제공
오늘 소개할 식민지 시대의 그림엽서 첩인 ‘펜화 스케치 경성의 근대미
(ペン畫スケッチ京城の近代美)’ 가운데 노들섬 보트장의 모습을 담은
엽서가 한 장 있다. 20세기 전기의 엽서 가운데 많은 수는 흑백사진이지만,
흑백사진에 색을 입히거나 처음부터 이렇게 그림으로 풍경을 묘사한 것들도
간혹 보인다.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은 물론
흑백사진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진으로 전할 수 없는 당시 사람들의 느낌이
그림을 통해서는 전달될 수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흑백사진 이상으로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20세기 전기의 그림엽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수집하고 연구한다.
노들섬의 모습을 그린 엽서의 왼쪽 위에는 ‘경성 한강인도교’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한강인도교는 오늘날의 한강대교로서, 제1한강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림 왼쪽이 강북이고 그림 오른쪽이 오늘날의 노량진 사육신묘 근처일 터이다.
오른쪽 위에 멀리 보이는 산은 아마도 관악산일 듯하다. 노량진과 관악산 아래에는
조선 여성들이 강가에서 빨래하는 장면이 흑백으로 그려져 있다.
이 한강인도교는 해방 이후에도 서울, 나아가 한국의 중심축인 경부선·경인선 철도의 핵심적인 교량으로 기능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사흘 뒤인 1950년 6월 28일에 한국 정부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 다리를 건너 한강 남쪽으로 향하던 피란민 800여 명이 이 폭파에 의해 사망했다.
6·25전쟁 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인 한강인도교 폭파 사고다. 현재, 이 사고를 추도하는 위령비는 없다.
이 폭파 사고의 사실을 기록한 작은 동판(銅版)이 한강대교 근처의 바닥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한강인도교 폭파 사고의 위령비를 노들섬에 세우자는 지당한 요구는 바로 지난해까지도 관계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다행히 올해 들어 박원순 서울 시장이 위령비 건립에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을 추도하는 위령비가 노들섬을 포함한 한강대교 주변에 세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1970년 제주 남영호 침몰 사고나 1995년 삼풍백화점 참사를 기리는 위령비는 현재, 사건 현장과 무관한 곳에 세워져 있다.
위령비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 때문이라 한다.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의 위령비는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한다.
식민지 시대의 비극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의 비극적인 사건들 또한 미래의 한국을 위한 교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시덕의 '문헌학자의 근대 탐험'을 시작합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김시덕 교수는 문학과 역사를 두루 전공한 문헌학자. 20세기 초반 근대 도시와 명승지의 관광 팸플릿 등 당시의 대중에게는 친숙했지만, 지금은 희귀해진 자료와 함께 근대를 여행합니다. 첫회는 금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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