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 2018.12.17. 10:03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가 전 세계 금융시장을 덮쳤다. 미국 국채의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벌어진 데 이어 국내 장단기 채권금리 차이도 10년 만에 최소치로 줄어들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중국 경제성장률이 내리막길로 치닫는 데다 그나마 분위기 좋다는 미국조차 경기 하강 신호가 감지되면서 세계 경제 비관론이 번지고 있다.
▶잘나가던 미국 불안
▷장단기 국채금리차 11년 만에 최저
그간 글로벌 경제 호황을 이끌어오던 미국 경제조차 2019년부터는 성장세가 둔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10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미국 경제가 2019년 성장률 2.5%를 기록할 것이라 내다봤다. 7월 발표한 전망치인 2.7%보다 0.2%포인트 낮다. JP모건도 미국 경제성장률이 올해 4분기 3.1%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고 2019년 1분기에는 2.2%, 2분기 2%로 낮아질 것으로 내다본다. 이후 3분기 1.7%, 4분기 1.5%로 급락할 전망이다.
미국 성장세가 한풀 꺾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금리 인상이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ed)는 2015년 12월 이후 기준금리를 여덟 번 올렸다. 최근 들어서는 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지만 내년에도 인상 기조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얀 하치우스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3월에는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6월, 9월, 12월 세 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 내다봤다.
부동산 경기가 둔화될 조짐을 보인다는 점도 우려를 더한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금리가 오르면서 대출금리가 상승하고 주택 가격 상승에 대한 부담으로 미국 부동산 시장이 활기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년여간 미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정부 주도 경기 부양책 효과가 점점 사그라드는 점도 문제다. 지난 11월 진행된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한 만큼 추가 조치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중국과 미국 간 통상마찰이 당초 예상을 깨고 장기화되고 있다는 점 또한 위험 요소다.
최근 역전된 미국 장단기 국채금리 차이는 ‘침체기 임박설’에 기름을 부었다. 12월 4일(현지 시간) 미국 국채 2년물은 2.7987%로 마감했다. 5년물 금리(2.7871%)보다 높아졌다. 장단기 금리가 역전된 것은 2007년 이후 처음이다. 10년물과 2년물 금리 차이도 빠르게 줄어드는 중이다. 올해 3분기까지만 해도 10년물과 2년물 금리 차이는 0.3%포인트대를 유지했으나 12월 들어 0.1%포인트대로 떨어졌다. 장단기 금리차 축소는 경기 침체의 전조로 해석된다. 장기 국채금리는 장기 경제성장률 전망과 인플레이션 기대감을 반영하는데 장기 금리가 낮아졌다는 것은 불황에 대한 우려가 크다는 의미다. 1955년 이후 미 국채 2년물과 10년물 금리는 10번 역전됐는데 이 중 9번은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
▷무역전쟁 여파로 중국 내리막길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미중 무역전쟁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이후 중국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통상마찰 여파가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부문은 수출이다. 올해 11월 중국 수출액은 11조5700억위안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2% 증가하는 데 그쳤다. 시장 전망치인 12.6%를 밑돈다. 10월 증가율(20.1%)보다도 한참 낮다. 중국 내수 경제도 흔들리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11월 중국 제조업구매관리자지수(PMI)가 50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PMI가 50보다 낮으면 향후 경기가 위축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기업인이 많다는 의미인데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소비도 주춤하는 모양새다. 10월 중국 소매판매액은 지난해 10월에 비해 8.6% 증가하는 데 그쳤다. 시장 예상치인 9.2%에 비해 낮다.
중국 외 다른 신흥국으로 눈을 돌려봐도 대체로 전망이 부정적이다. IMF는 아르헨티나 경제성장률이 올해 -2.8%, 내년 -1.7%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한다. 브라질 정부는 최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6%에서 1.4%로 내렸다. 이상원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브라질의 경우 10월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 상황이 안정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지만 여전히 주요 국가에 비해 불확실성이 높다. 식품, 철광석 등 주요 수출 원자재 가격도 하락세”라고 분석했다.
▷경기 침체 우려에 장기채 금리 급락
한국 경제에도 악재가 겹쳤다. 당장 채권시장 흐름도 불안하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2월 6일 서울 채권시장에서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0.075%포인트 내린 연 1.983%로 마감했다. 3년물 금리(연 1.839%)와의 차이가 0.144%포인트까지 좁혀졌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10월 9일(0.14%) 이후 가장 작은 격차다.
국내 장기 채권금리가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된 지난 5월부터다. 무역전쟁 여파로 글로벌 경기 불안 우려가 커지면서 연 2.8%대를 유지하던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6월 말 2.55%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후에도 장기 채권금리 하락세가 지속되는 반면 단기 채권 금리는 바닥을 다지면서 격차가 줄었다.
금융권에서는 머지않아 장기물 채권금리가 단기물보다 낮아지는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우려한다. 정부가 10년 만기 국고채를 처음 찍은 2000년 10월 이후 국고채 10년물 금리가 3년물을 밑돈 시기는 2007년 11월 말~2008년 1월 초, 2008년 7월 중반뿐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한국은행 기준금리 인상으로 단기 금리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경기 침체 우려가 장기 채권금리를 짓누르는 분위기다. 빠르면 내년 초 국고채 10년물 금리가 3년물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올 들어 경기지표에 줄줄이 ‘빨간불’이 켜졌다. 통계청과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국민이 느끼는 경제적 어려움을 수치화한 ‘경제고통지수’는 지난 10월 5.5로 2011년 10월(6.5) 이후 7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경제고통지수란 실업률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더한 값이다. 경제고통지수가 높을수록 실업자가 많고 물가가 비싸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고통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난 10월 실업률은 3.5%로 2005년 10월(3.6%)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달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2%로 2012년 2.1% 이후 6년 만에 가장 높았다.
각종 경제지표가 악화되는 데다 반도체가 주도해온 수출마저 불안한 모습이다. 지난 11월 기준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은 4.5%에 그쳐 10월(22.7%) 대비 급락했다. 반도체 수출이 주춤한 영향이 크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는 지난 10월 D램 고정거래가격이 9월보다 10.74% 급락했다고 밝혔다. IT 기기 저장장치로 쓰이는 낸드플래시 가격은 7월부터 하강 국면에 빠졌다. 세계 반도체 시장 성장률이 올 3분기 14%, 4분기 6%에 그칠 것이란 전망(미국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도 나왔다. 지난해까지 20% 이상 성장세를 보였던 것과 대비된다. 올 들어 10월까지 반도체 수출액은 1072억달러(약 120조원)로 한국 전체 수출의 21%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한국 수출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 이외 다른 산업 전망도 어둡다.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내년 주요 산업별 수출 증가율 전망을 보면 주력 산업 중 반등이 예상되는 산업은 조선과 정보통신기기 2개뿐이다. 그마저도 올해 실적 부진에 따른 기저효과 영향이다. 수출을 이끌었던 정유 산업 수출 증가율은 올해 34.4%에서 내년 6.1%로 급감하고 석유화학도 14.6%에서 0.4%로 하락한다는 예측이다. 자동차, 철강, 가전, 디스플레이는 아예 마이너스로 돌아서거나 하락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당연히 성장률도 추락할 수밖에 없다. 3분기 경제성장률은 0.6%에 그쳐 2분기에 이어 0%대를 이어갔다. 주요 연구기관도 내년 한국 경제 전망치를 속속 낮췄다.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경제성장률을 올해 2.8%, 내년에는 2.6%로 내다본다. 지난 4월 전망치와 비교해 올해는 0.2%포인트, 내년에는 0.3%포인트 하향 조정한 수치다. 심지어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한국 성장률이 내년 2.3%에 그칠 것으로 우려했다. 2.3% 성장률이 현실화되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0.7%) 이후 10여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국내 연구기관도 우울한 전망을 내놓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9%에서 2.7%로 낮췄다. 국내 대표 싱크탱크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올해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각각 2.9%에서 2.7%로, 2.7%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KDI는 ‘12월 경제 동향’ 보고서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내수가 부진한 가운데 수출 증가세도 완만해지면서 점진적으로 둔화하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1월 처음 ‘둔화’라는 표현을 넣더니 12월에는 표현 수위가 더 높아진 셈이다. 김현욱 KDI 경제전망실장은 “민간 설비, 건설투자 부진이 심각한 상황에서 가계 지갑마저 닫히고 있어 내수 두 축인 투자, 소비가 동반 부진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최저임금 인상 등 악재 수두룩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진 것은 조선,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 침체뿐 아니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등 문재인정부 소득주도성장 정책 영향도 크다는 분석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최근 발표한 ‘OECD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한국은 고용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피하기 위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속도를 낮춰야 한다”고 권고했다. 앞서 “생산성 제고가 뒷받침되지 않은 최저임금 인상은 한국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에 이어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이런 지적과 함께 내년 한국 실업률 전망치도 당초 3.7%에서 4%로 올려 잡았다.
특히 중소기업이 최저임금 인상 직격탄을 맞았다. 최저임금 인상을 피해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중소기업도 급증했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중소기업 해외 투자액은 올 들어 3분기까지 74억2571만달러(약 8조4000억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지난해 투자액을 넘어섰다.
주 52시간 근무제 영향도 만만찮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른 근로시간 단축으로 26만6000명의 인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연간 12조3000억원의 비용 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나마 대기업은 버틴다지만 중소기업들은 노동시간 감소분을 채울 만큼 신규 고용을 못하면 생산량을 줄일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중앙회가 국내 500개 중소기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근로시간 단축 후 중소기업들은 평균 6.1명 인력이 부족하고 생산량도 20.3%가량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보완책으로 탄력근로제가 거론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현행 제도에서는 탄력근무제 단위 기간을 3개월 이내로 정하는 것만 허용된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적용 기간을 6개월~1년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최대 1년으로 확대하고 최저임금의 업종별 구분 적용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탄력근로제 확대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연내 입법은 끝내 무산됐다. 임금 하락, 과도한 노동을 이유로 노동계가 반발하자 청와대와 여당이 입법을 미룬 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논의를 더 지켜보는 쪽으로 물러섰기 때문이다. 탄력근로제 확대 입법 없이 연말 주 52시간 근무제 준수 계도 기간이 끝나면 재계는 내년부터 아무런 대책 없이 주 52시간 체제를 맞아야 한다. 산업 현장마다 대혼란을 겪을 우려가 크다. 재계 관계자는 “청와대가 노동계에 끌려다니다 보니 재계가 요구하는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조차 시행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기업이 혼란에 빠지면 내년 경기회복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논란이 커지자 홍남기 신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민 피부에 실질적으로 와닿는 고용, 분배, 성장률 지표 개선에 중점을 두겠다. 최저임금 등 과속 정책을 보완하겠다”고 밝혔지만 얼마나 성과가 나타날지는 의문이다.
▷수출 시장 다변화·규제 완화 절실
전문가들은 미국 경기가 빠르게 침체되면서 당장 한국이 악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임혜윤 KT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 고용지표와 ISM제조업지수 등 주요 수치가 안정적인 흐름이다. 최근 장단기 금리차가 축소되며 제기된 미국 경기 침체 우려는 과도하다”고 설명했다. 신동준 KB증권 이코노미스트도 “장단기 금리 역전이 6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 한 경기 침체로 이어질 확률은 낮다”며 “통상 경기 침체 이전에는 과잉부채나 과잉투자 등이 발생하는데 지금은 이 같은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물론 결코 안심할 때는 아니다. 미중 무역전쟁 여파가 커지면서 미국 경제성장세가 급격히 둔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경제 기초체력을 끌어올리는 등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경제 침체기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단정을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근 미국 장단기 금리차 축소는 분명 우려할 만한 신호다. 금리 차이 축소 자체는 위기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낮지만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교역 감소와 결합되면 불황의 촉매가 될 확률이 있다”고 설명했다. “향후 미국이 예상보다 빠르게 경기 후퇴기에 접어들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면서 “완화적 통화정책과 성장 중심의 재정정책이 절실하다. 가계부채 문제, 고용 부진 등 국내 경제 리스크 요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정민 연구위원 진단도 눈길을 끈다.
한국 경제가 활력을 찾으려면 수출 시장 다변화와 함께 주력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 개혁, 신성장 산업 규제 완화가 절실하다는 것이 전문가들 얘기다. 장윤종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중 무역전쟁이 악재지만 미국이 중국 반도체 등 지식재산권 문제를 건드려주면서 오히려 한국에 숨통이 트일 가능성도 있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4차 산업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김경민 기자 kmkim@mk.co.kr, 김기진 기자 kjkim@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88·송년호 (2018.12.19~12.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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