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얘기지만, 서울대 의대 합격이 안온한 삶을 보장하는 시대는 끝났다. 하버드 의대나 존스홉킨스 의대를 나와도 인공지능(AI) 의사와 경쟁하고 협력하는 시대가 됐다. 모든 의학 지식과 정보, 최신 임상 사례와 연구 결과를 섭렵한 AI 의사가 진단·처방·투약·시술에서 인간을 능가할 날이 머지않았다. 자식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한서진은 딸을 의사보다 AI나 바이오 전문가로 키우는 게 낫다.
자신보다 나은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대다수 학부모의 꿈이었다. 그 일념으로 한국의 학부모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 교육에 올인했다. 그 결과 가끔 개천에서 용도 나오고,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를 이기기 힘들다. 눈치 빠른 학부모들은 자기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눈높이를 낮췄지만, 그마저도 힘든 세상이 됐다. 2016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자녀의 생활 형편이 부모 세대보다 나아질 것으로 보는 한국인은 1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퓨리서치 조사에서 자녀의 삶이 자신의 삶보다 좋아질 거란 응답은 미국 33%, 영국 23%, 프랑스와 일본은 15%에 그쳤다.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현실도 다르지 않다. ‘노란 조끼’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프랑스의 청년실업률은 25%에 달한다. 한국(10%)보다 훨씬 높다. 힘겹게 취업해도 임시직이나 파트타임이 대부분이다.
‘증권계의 미래학자’로 잘 알려진 홍성국 전 대우증권 사장이 최신 저서 『수축사회』에서 제시한 전망은 더 암울하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전 세계가 팽창사회에서 수축사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 생산성의 획기적 증대에 따른 공급과잉이 상시화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여기에 사상 최고 수준의 부채와 양극화가 겹치면서 더는 성장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부가 돈을 풀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로 펌프질을 해도 일시적 효과에 그칠 뿐,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난망하다는 지적이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는 소득주도 성장을 둘러싸고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를 통해 소비를 진작하고, 양극화를 완화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이 쓰러지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했다. 성장세 회복과 일자리 창출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엉뚱한 데 힘을 쓰다 정책은 정책대로 실패하고, 욕은 욕대로 먹은 꼴이다.
정부와 기업, 개인 모두 팽창사회의 미망(迷妄)에서 깨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부는 준법, 투명성, 신뢰, 양보와 타협 등 사회적 자본을 확충함으로써 수축 국면에서 불가피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고 완화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홍 전 사장은 말한다.
행복에 대한 개인의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고 욕망에 반비례한다는 것이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제시한 행복 방정식이다. 분자인 소유를 늘리는 것이 팽창사회의 행복 추구 방식이었다면 수축사회에서는 분모인 욕망을 조절해 행복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다. 변화의 싹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배명복 칼럼니스트·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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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축사회에 대한 보완자료]
홍성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펴냄
한 달 전 만난 홍성국 혜안리서치 대표는 앞으로 장기적 관점의 주식투자가 어려울 것이라 진단했다. 우량종목을 선별해 장기적으로 보유하더라도, 피터 린치가 얘기한 10루타 종목이 탄생하는 것은 희박하다는 분석이다. 홍 대표의 진단은 비단 국내 주식시장에 대해 한정한 전망이 아니다. 미국 증시와 경제를 이끄는 아마존 또한 훗날 산업의 판이 획기적으로 바뀌었을 때 지금과 같은 실적을 견인할 수 있을지 확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 대표는 산업의 판이 재편되는 흐름을 기업의 생존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100년 대기업이 흔했고,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30년이 걸렸던 20세기 과거와 비교하면, 21세기 현재엔 급하게 팽창했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기업들도 부지기수다.
리서치센터장 출신으로 1위 증권사 사장을 역임하며, ‘증권계의 미래학자’로도 불리는 홍성국 대표가 책 ‘수축사회’를 출간했다. 홍 대표가 정의한 수축사회란 디플레이션이나 경제위기만으로 더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다. 인구가 감소하고 생산성은 획기적으로 늘어나 공급과잉은 심화하고,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전 국가가 역사적으로 사상 최대수준의 부채규모를 경신하고 있어 더 성장이 어려운 사회다.
홍 대표는 전 세계가 2000년대 초반 글로벌 호황 이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겪으며 본격적인 ‘수축사회’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했다. 2007년 7월 25일 사상 처음으로 2000선을 돌파한 코스피지수는 14일 2069.38포인트에 거래를 마감하면서 11년 동안 횡보하고 있다. 지수 자체가 10년간 정체됐다는 것은 10년간 장기 투자하더라도 오히려 10년 전보다 주가가 내려간 종목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얘기다.
책에서 홍 대표는 21세기 이후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4개 정권 모두 나름대로 수축사회 진입을 막고자 관련 대책을 발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대규모 정책 추진에도 국내 경제가 수축 사회 진입을 앞두게 된 이유는 정부가 지금도 한국 사회를 ‘팽창사회’로 진단하고 정책을 추진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시점’에서 벗어난 과거형 대책 때문에 효과는 없고 예산만 낭비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홍 대표는 생존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 발굴은 고사하고 근본적 사회문제는 다음 정부로만 넘기는 책임회피만 20년 가까이 이어왔다고 지적했다.
수축사회 진입을 앞둔 한국이 생존하기 위한 길은 무엇인가. 홍 대표는 책을 통해 그 해답이 ‘혁명적 구조 전환’에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수축사회 진입을 늦추려면 채택해야 할 핵심 관점을 5가지로 요약했다.
수축사회로 인식을 전환하는 것,
사회 전체를 거대한 생태계로 파악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
입체적 혁명,
미래에 대한 집중,
사회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비전이다.
홍 대표는 “수축사회는 역사적 필연이므로 수축사회에서 벗어나게 할 묘책은 없다”면서도 “수축사회에 대한 인식이 강해지면 수축사회 진입 속도를 늦추고, 경쟁국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앞으로 5년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말했다.
임성엽기자 starle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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