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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0] 敵國 영국에 유학간 15명의 日 소년들

바람아님 2018. 12. 28. 18:09

(조선일보 2018.12.28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65년 3월, 사쓰마번의 작은 포구 하시마(羽島)에서 15명의 앳된 소년들이 증기선에 오른다.

번주의 명으로 비밀리에 영국 유학을 떠나는 소년들이었다. 배에 오른 소년들은 촌마게(사무라이 상투)를 풀어

단발(斷髮)하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1862년 8월, 일본은 '나마무기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다.

요코하마 개항지 인근의 나마무기(生麥)를 지나던 사쓰마 다이묘(大名) 행렬에 영국인들이 말을 타고 끼어들어

행렬이 흐트러지자 사무라이가 이들을 베어 버린 사건이다.

영국 정부가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사쓰마는 외국인들이 일본 법도인 하마평복(下馬平伏·말에서 내려 몸을 낮춤)의

예(禮)를 어긴 데 대한 정당한 조치였음을 들어 책임을 부인한다.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0] 敵國 영국에 유학간 15명의 日 소년들


1863년 8월, 영국은 6척의 군함을 사쓰마로 보내 무력시위에 나섰고, 도발에 자극받은 사쓰마의 해안 포대가 포문을

열면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소위 '사쓰에이(薩英)전쟁'의 발발이다. 피격을 당한 영국 함대도 피해가

상당했으나, 시내가 불바다에 휩싸이며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된 사쓰마의 사실상의 패배였다.


사쓰마의 지사(志士)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서양으로부터 배워야 함을 절감한다.

가장 역점을 기울인 것은 인재 양성. 1864년 양학 교육기관인 가이세이쇼(開成所)를 설립하고, 이듬해 우수생을

선발하여 영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모두에 언급한 소년들이다.

어제의 적(敵)이던 영국은 발상을 전환한 사쓰마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유학생 중의 한 명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는 영국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귀국하여 1872년 일본 최초의

외교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주영 공사, 외무차관이 되어 서구 열강과의 외교 현장에서 활약한다.

메이지 시대는 '싸움에서 지는 것은 분한 것이지만, 승자에게 배우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발상이 낳은 인걸들이 활약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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