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19.03.03. 14:38
“영변 핵시설보다 플러스 알파를 원했다. (그간 협상 때) 나오지 않은 것 중에 우리가 발견한 것,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던 것 같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영변 핵시설을 ‘깨끗하게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우리가 제시한 영변 핵시설이라는 게 만만치 않은 것이다. (북한은) 아직까지 핵시설 전체를 폐기 대상으로 내놔 본 역사가 없다.”(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지난달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미국과 북한이 각각 내놓은 반응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보다 더 많은 것, ‘플러스 알파’를 요구한 반면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만 해도 엄청나게 대단한 진전이란 종전 입장을 고수한 것이 회담 결렬의 근본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미국만 알고 한국은 전혀 모르는 기밀 많다"
‘빈손 회담’, ‘빅딜도 스몰딜도 아닌 노딜’ 등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이번 회담의 결말을 거의 정확히 예측한 책이 있어 눈길을 끈다. 40년 가까이 외교관으로 일하며 외교부 북핵담당대사를 지낸 이용준(63·사진) 전 대사가 주인공이다.
3일 외교가와 출판업계에 따르면 이 전 대사는 북·미 2차 정상회담 개최가 확정된 직후인 올해 1월30일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기파랑)이란 책을 펴냈다. 핵문제와 관련해 그간 한국 정부는 끊임없이 북한에 속아왔으며,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을 중국이 적극 후원하는 상황에서 한국 외교의 선택지는 단 하나, 미국과의 한·미 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는 길뿐임을 역설한 수작이다.
앞서 소개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 그리고 ‘우리(미국)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다’는 대목이다.
이는 북한에 영변 핵시설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치명적인 핵시설이 존재하며, 북한이 그 존재를 철저히 감춰왔기에 미국 말고 다른 나라들은 잘 모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북한이 놀랐다’는 표현에선 이번에 그 존재를 미국에 제대로 들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느꼈을 당혹감과 낭패감이 생생하게 읽힌다.
발언이 알려진 뒤 국내에선 ‘과연 한국 정부는 미국이 제기한 영변 이외 핵시설의 존재를 알고 있느냐’는 의문이 일었다.
당장 지난 1일 자유한국당 등 야권은 “정부는 영변 이외 북핵 시설을 정말 몰랐느냐”고 추궁했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언론과의 통화에서 “(정부가 영변 이외 핵시설을) 몰랐다면 무능이고 알았다면 대국민 사기”라고까지 했다.
이 전 대사는 저서에서 ‘미국과 북한만 알고 한국은 모르는 정보’가 분명히 존재함을 본인의 경험을 들어 지적했다. 1987년 11월 북한의 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이 전 대사는 외교부 북미과 실무자였다.
사건 초기 “북한 공작원의 테러”라는 한국 정부의 발표를 미국 정보당국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미국은 한국 공안당국이 여당 후보한테 유리한 ‘북풍’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사건의 진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폭파범인 김현희와의 독대를 요구했다.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큰 불신을 가졌던 그들은 놀랍게도 (면담 후) 불과 한두 시간 만에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임이 100% 확실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어떻게 그리도 빨리 명확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 필자가 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물어본 결과 (…) 그들은 북한과 미국만 알고 한국 정부는 전혀 모르는 여러 개의 북한 관련 기밀정보들을 다른 여러 개의 가짜 정보들과 섞어 김현희 앞에 펼쳐놓고 그중 진짜 정보를 골라내게 했다고 한다. 김현희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정확히 진짜 정보를 골라내자 그들은 상당히 고위급의 북한 공작원임에 틀림없음을 곧바로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 중에서)
◆"영변 시설은 고철 수준… '핵개발 박물관'에 불과"
이번에 회담 결렬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영변 핵시설의 위상과 능력을 둘러싼 미·북 양측의 입장차다. 오랫동안 북핵 문제를 다뤄온 이 전 대사가 영변 핵시설에 대해 내린 평가는 미국보다 오히려 더 냉정하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려면 영변 핵시설 폐기만 갖고는 안 되고 그 이상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미국 입장의 태도와 아주 비슷하다.
“영변의 시설은 효율성도 떨어지고 낡은 고철 수준이라 현재는 큰 의미가 없는 부수적 시설일 뿐이다. 1990년대에 북한 핵문제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한다는 말에 감격을 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제 이 시설은 북한 핵문제의 핵심 쟁점과는 크게 동떨어진 ‘핵개발 역사박물관’에 불과하다. 북한이 현재 핵무기용 핵물질을 생산해내는 핵심 시설은 2000년대 초부터 비밀리에 건설해 온 우라늄 농축시설들이다. 우라늄 농축시설의 높은 은닉성 때문에 어디에 어떤 규모의 시설이 있고 그 시설이 어느 정도 가동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로부터 매일 생산되는 핵물질의 양이 영변 핵시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다는 사실뿐이다.”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 중에서)
그럼 ‘노딜’로 끝난 이번 미·북 정상회담은 잘 된 것인가, 아닌가. 이 전 대사는 유엔 대북제재 완화, 주한미군 감축 같은 양보의 대가로 영변 핵시설 폐기를 얻어냈다면 그와 같은 협상은 한국과 미국 입장에선 ‘완전한 실책’이요, ‘최악의 결과’라는 견해가 확고하다. 실제로 이 전 대사는 회담 결렬을 이미 예상했던 듯하다.
그가 책 말미에 “설사 이번 미·북 협상이 실패하더라도 협상은 훗날 언제라도 새롭게 재개될 수 있다”고 긍정적 전망을 내놓은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 전 대사는 “북한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양보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분석했다. 당분간 북한의 태도 변화에 일희일비할 것 없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굳건히 유지하면 결국 제재 완화에 안달이 난 북한 스스로 협상 테이블로 되돌아올 것이란 뜻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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