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05.13. 00:07
최저임금 속도조절은 뒤늦은 반성
'업적 빈곤, 지지 급락' 운명 피해야
진보의 공적 지켜낼 정책전환 절실
저 벅찬 기운을 서생(書生)이 어찌 감당하랴. 상소 책문을 하나씩 들고 사회원로들이 등청했다. 무슨 말을 해도 면책되는 홍문관 회의였다고 할까. 조선시대 같으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로 시작해, ‘통촉하여 주옵소서’로 마감하는 그런 읍소의 시간이었다. 실제로 분위기가 그랬다. 원로들은 노련했고 사욕이 없었다. 시간이 모자랐을 뿐 후사가 두려워 말을 아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주, 아니, 대통령도 진지하게 경청했다. 대통령의 ‘마음의 행로’는 어떨까, 초면이지만 그걸 읽고 싶었다.
대통령의 표정은 솔직했다. 어느 관상학자가 소상(牛相)이라 하지 않았는가? 노무현 정권 비서실장 때도 너무 진지해서 탈이었다. 그런데 어두웠다. ‘정치가 힘들다’는 모두 발언에 그런 마음의 상태가 실렸다. 북한이 다시 강짜를 부리고 미국의 호응도 예전 같지 않은 탓이라 짐작했다. 거기에 한국당이 거리로 뛰쳐나갔으니 ‘협치’는 끝장났다는 낭패감이 겹쳤다. 피로감이 역력했다. 진지하고 솔직한 기질은 눙치지 못하는가. 표정 연출을 할 수는 없는가. 원로자문단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원로자문단을 운영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북악산 정자에서 대취해 원로의 부축을 받고 하산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철인(鐵人)이 아니다. 원로들은 꾸짖지 않는다. 다만 길을 가르치고 지혜를 줄 뿐이다.
대통령이 열거한 통계가 시정(市井)의 현실과 동떨어졌음을 알려줄 사람도 원로다. 지난 KBS와 단독대담에서 대통령이 콕 집어 말한 수치들이 정말 맞다고 맞장구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외려 가슴을 쳤을 것이다. 가구소득 격차, 청년 체감 실업률 역대 최고, 경제성장률과 설비투자율이 바닥을 친 현실은 제쳐두고 살짝 고개를 든 경제 지표를 보라고 했다. 냉해를 입어 주저앉는 매실나무도 안간힘을 내 꽃을 피우기는 한다. 생명에 노련한 농부는 직감적으로 안다. 밑동을 자를지, 가지를 쳐낼지, 아니면 새로 씨를 받을지를.
속도전에 남다른 한국에서 2년은 긴 세월이다. 백령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마라도까지 닿는데 1분이면 족한 나라다. 속전속결로 생계를 이어온 서민들이 청와대발(發) 정책에 대응태세를 갖추는 데에 한 달이면 족하다. 최저임금 인상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처음 인정한 대담이었다. 속도 조절조차 필요치 않은 영역으로 이미 이동한 영세공장주, 자영업자들은 향후 대책을 고대했건만 조금 기다려달라는 권유를 받았을 뿐이다. 임금노동자 형편은 나아졌다! 통계상 맞는 말이다. ‘주 52시간 규제’가 50인 사업장까지 적용될 내년에도 그럴까? 시간제, 계약제, 하층 노동자들에게 ‘주 52시간 규제’는 사약(賜藥)일 뿐이다.
그럼에도 말 속에 서린 결기는 서늘했다.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은 완결되어야 하며 ‘타협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의당 그래야 하지만, 우두머리들의 목을 치고 공수처 설치로 ‘완결!’을 선언하면 어떨까. 삼족을 멸한다고 제초제 뿌린 밭엔 푸성귀도 자라지 않는 법. 새로운 행군을 위해 이쯤 전환하는 게 좋겠다는 원로들의 권유가 비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지율이 빠지면 혁신 동력이 고갈된다. 민주화 이후 예외 없이 겪었던 일종의 풍토병, ‘빈곤한 업적, 지지율 급락’ 쓰나미가 현 정권도 덮칠까 위기감이 스쳤다.
지난주로 집권 3년 차, 대선 정국 1년을 빼면 거의 반환점을 돈 셈이다. 현 정권이 올인한 노동개혁은 부작용에 아우성이고, ‘정의로운 나라’의 정의(正義)는 적폐청산의 벽을 넘지 못한다. 인권변호사 경험과 노무현 정권 당시 재벌과의 샅바싸움에서 터득한 그 바위 같은 확신에 필자가 어물쩍 제안한 ‘고용주도성장’은 결국 식자의 꼼수였다.
한국의 군부독재가 잉태한 ‘혁명세대’, 이젠 586세대로 불리는 혁명세대의 전위가 집결한 청와대는 단호했다. 핵무장 북한을 이 만큼이나마 움직였고, 한국의 정치경제와 역사인식을 보수의 시궁창에서 건져낸 진보세력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원로들의 시선엔 우려가 쌓였다. 지난번 ‘정주고 내가 우네’를 썼던 필자는 간담회 후 ‘미워도 다시 한번’을 쓰려 했는데, 고심 끝에 제목을 바꿨다. 세대 경험과 역사적 해원(解冤)에 일로매진하는 집권세력, ‘일편단심 민들레야’다. 쾌청한 오후, 걸어서 집무실로 향하는 대통령의 무거운 어깨에 햇살이 굴러떨어졌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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