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침투 '흑묘부대' 억류되자
대만은 은폐 위해 사망자 처리
25년 만에 귀환한 U-2 조종사
장리이씨의 한과 러브스토리
북미 지역 화교 신문인 세계일보 등에 따르면 장리이는 작전 중 격추돼 중국에 억류됐다가 25년 만에 귀환한 역전의 용사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지난해 가을 대만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질풍유령 흑묘중대(疾風魅影 黑貓中隊)’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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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은 휴전 서명을 막 끝낸 상황에서 직접 나서기엔 부담이 컸다. 미국은 동맹이자 중공군에 밀려난 장제스(蔣介石) 정부에 정찰기를 제공하고 대리 정보전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52년 대만에 시팡(西方)공사란 위장기업을 세워 거점으로 삼은 뒤 국민당 정권을 상대로 정찰부대 창설을 지원했다. 국공내전에서 경험이 많은 조종사들이 대거 차출됐다. 58년에는 RB-57D 고고도정찰기가 처음 투입됐다.
문제는 거리였다. 중국의 핵실험장이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 롭 누르 지역에서 흑묘중대 기지인 타오위안 비행장까지는 무려 2700㎞나 떨어져 있었다. 중거리 정찰기인 RB-57D로는 임무 수행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CIA에 장거리 작전이 가능한 U-2 도입을 지시했다.
우선 대만 공군은 59년, 12명의 베테랑 조종사를 당시 미국령인 오키나와의 가데나기지로 보냈다. 이 중 5명이 최종 선발돼 미 텍사스 로플린기지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았다. 이듬해인 60년 7월 미국은 대만 정부에 U-2 정찰기 2대를 매각했다.
62년 1월 13일 드디어 흑묘중대의 첫 임무가 시작됐다. 이후 이 부대는 U-2기 19대로 100여 차례 이상 중국 상공으로 침투해 핵실험장과 탄도미사일 실험장 등을 정탐했다. 74년 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총 임무 수행 횟수는 220회에 달했다.
흑묘중대가 정찰비행을 나설 때에는 미국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이 동시에 승인해야 했다. 정찰기에서 촬영한 필름은 주일 미군기지에서 현상해 미 본토로 보내졌다. 전직 흑묘중대원들은 다큐멘터리에서 “한번 임무를 나갈 때마다 수천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대만 정부는 이들을 모두 사망자로 처리했다. 작전 내용을 은폐하기 위해 가짜 묘도 세웠다. 장리이의 생존 사실은 82년 중국 당국이 그의 존재를 공개할 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장리이가 몰았던 U-2기는 65년 내몽골자치구 바오터우에서 격추됐다. 원자폭탄 제조시설을 촬영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발생한 일이었다.
체포 이후 그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스파이 반역자로 내몰려 고문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농촌으로 내려가 강제노역을 하는 하방(下放) 조치를 당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국공내전 당시 헤어졌던 생모와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포로 생활을 한 지 17년이 흐른 82년 중국 당국은 그를 석방하기로 결정하고 서방 언론에 노출시켰다. 그런데 대만 정부가 그의 송환을 거부했다. 중국의 세뇌로 사상이 의심된다는 게 이유였다.
장자치는 8년간 과부로 지내다가 다른 군인 남성과 재혼했다. 그런데 재혼을 하면서 ‘만에 하나 남편이 살아 돌아온다면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가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장리이 역시 중국에서 오랜 억류 기간 부인을 그리워하며 재혼하지 않았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약속은 실현됐다. 82년 장리이가 홍콩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자치는 이듬해 남편을 만나기 위해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장리이의 국적 회복 문제로 두 사람은 뜨거운 재회를 뒤로하고 또다시 7년간 생이별을 하게 된다.
90년 미국의 중재로 고국 땅을 밟게 된 장리이는 이듬해 미국에서 장자치와 다시 한번 결혼식을 가졌다.
이후 부부는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운듯 서로를 극진히 아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장자치는 간암 판정을 받고 3년 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리이의 타이베이 자택에 걸린 달력은 그녀가 숨진 달에 멈춰 있었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이후 74년 10월 흑묘중대는 완전히 해체됐고, U-2 정찰기는 전량 미국으로 반환됐다.
미국은 흑묘중대를 없애며 대만에 정찰위성으로 촬영한 사진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전직 대만 정보부대 관계자들은 다큐멘터리에서 “미국이 건넨 사진들은 해상도가 너무 낮아 정보로서 가치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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