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숲 가장자리나 길섶에는 그저 한 자 남짓한 줄기 끝에 노란 꽃들이 흐드러져 있다. 꽃이 예뻐 따보면 잘린 줄기 끝으로 샛노란 즙이 우러나는데, 그게 꼭 갓난아기 똥처럼 보인다 하여 애기똥풀이라 부른다. 그 즙이 젖처럼 배어난다 하여 '젖풀'이라 부르기도 한다. 애기똥풀의 즙은 예로부터 한방 약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려서 동네 형들이 별나게 사마귀가 많이 난 아이에게 이 즙을 발라주던 기억이 난다.
식물학자도 아닌 내가 애기똥풀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까닭은 그들의 씨를 개미가 날라 주기 때문이다. 애기똥풀의 씨에는 일레이오좀(elaiosome)이라 부르는 부분이 있는데 개미들은 그 부분만 떼어먹고 씨방은 건드리지 않은 채 자기들 텃밭에 뿌린다. 내가 우리말로 '개미씨밥'이라고 번역한 일레이오좀에는 흔히 구할 수 없는 지방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개미에게는 여간 좋은 먹이가 아니다.
최근 연구 논문에 따르면 약 1만1000종의 식물 씨앗에서 개미씨밥이 발견되었다. 이는 전체 속씨식물의 4.5%에 해당한다. 또한 흥미롭게도 개미씨밥은 지금으로부터 8000만년 이전에 진화한 식물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화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식물과 개미 사이의 공생 현상으로 보인다. 애기똥풀 외에도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로 씨앗에 개미씨밥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식물로 제비꽃과 금낭화가 있다. 다음에 이들을 보면 꼭 씨앗을 찾아 거기에 개미씨밥이 달려 있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애기똥풀은 뜻밖에 이른바 언어순화 운동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산하에는 애기똥풀 외에도 개불알꽃, 쥐똥나무, 노루오줌,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꽃며느리밥풀 등 언뜻 들어 고상하지 못한 이름을 달고 사는 식물들이 제법 있다. 고부갈등 때문에 특별히 며느리를 비하하는 이름들이 많은 건 안타깝지만 조금은 상스러운 우리말 이름에는 그 나름의 정겨움이 묻어난다. 애기똥풀을 '유아변초(幼兒便草)'쯤으로 부르면 갑자기 뭐가 좀 있어 보일까? 나는 오늘도 등굣길에 애기똥풀 꽃 한 송이를 꺾어 줄기 끝으로 흘러나오는 샛노란 액체를 바라보며 어느덧 나보다 훨씬 커 버린 아들 녀석의 그 옛날 기저귀를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는다.
(출처-조선일보 2011.06.06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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