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평창으로 가는 길. 회색빛 도시를 뒤로하고 노랑, 주홍 번져가는 단풍들의 향연 속으로,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덜컹덜컹 천천히 앞서가는 작은 트럭을 따라 속도를 줄이고 창문을 내려 가을바람을 담는다. 여름내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품어 안은 낟알들이 여물게 익어 탐스러운 황금빛으로 출렁이고, 트럭 짐칸에 옹기종기 앉은 시골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차창 너머 들려온다. 정직한 노동의 결실을 거두는 이때, 추수의 기쁨이 산과 들에 흐른다.
트럭이 지나간 자리에 은행나무들이 떨어낸 노란 은행잎이 꽃잎처럼 뿌려지는 시골 가을 길. 그 길 끝에 부모님이 계신다. 시골집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만나야 할 사람도, 가야 할 곳도, 볼 것도 많은 서울의 시간. 인사치레한다며 한 시간 간격으로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고선 막상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서 꺼낸 수북한 명함을 보며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 생각한다.
번잡한 도시의 어딘가에 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봐야 하지만 시골집의 시간은 다르게 지나간다. 천천히 동네를 걷다가 마주치는 사람과 '오래오래' 얘기를 나누고, 운 좋게 시골 장터라도 설라치면 싱싱한 재료로 잔뜩 장바구니를 채워와 '천천히'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가족과 나눠 먹는다. 거실 한편을 채운 화분들의 흙이 마르지는 않았는지, 떨어진 꽃봉오리는 없는지,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가을볕에 기대어 느긋하게 책을 펴들고 지루해질 때까지 책을 읽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누군가를 '깊이' 생각해보기도 한다.
오래오래, 천천히, 한참 동안, 깊이 흐르는 시간. 어느새 산 너머 해가 기운다.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만든 우물 안에 저녁 햇살이 잠겨 찰랑인다. 가만히 머리를 담가보니 이마에, 귓불에, 두 뺨에 온기가 번진다. 붙잡고 싶은 시간, 가을이 간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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