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부채비율이 500%가 훨씬 넘었고 특히 외화 차입이 많았던 대우그룹은 IMF에 들어가는 순간 생존확률은 희박했다. 단, 김대중 대통령과 친한 사이여서 구명줄을 김우중 회장은 좀 배짱을 부렸던 흔적이 있다. 차라리 겸손하게 시장에 순응했더라면….
1997년 11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나는 김우중 회장과 세계 경영에 대하여 힐튼호텔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김 회장은 어디에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얼굴이 흙빛이 되면서 넋이 나간 듯 "한국이 IMF에 들어간다고 한다"는 넋두리 같은 말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자들은 IMF행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으나 국제 경제와 금융 물정에 밝은 김 회장은 그것이 죽음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러시아 순방 시 나는 김우중 회장을 러시아 측 교통장관과 단출하게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러시아 장관은 시종 그를 '킴기스칸'이라 부르며 깍듯이 예우했다. 이어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소재 대우차 공장을 방문했을 때 금발 아가씨들이 생산라인에 수백 명이 투입돼 줄지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노란 병아리떼 같군"이란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한국이 자랑스러웠다.
풍운아 김우중 회장을 조문하며 팔순임에도 아직 눈매가 초롱한 부인 정희자 여사가 안쓰러웠다. 장례식을 다녀간 사람이 8000여 명이라 했는데 대우 관계자에게 물으니 단체로 와서 1명 이름만 기록한 경우가 많아 1만여 명은 될 거라고 했다. 문인 예술인의 이름도 많이 알려줬다. 그가 남긴 정신과 인연 때문일 것이다. 대우의 사훈은 창조·도전·희생 3개 단어를 열거했는데 나는 세계 도전 캔두(can do spirit) 같은 게 김 회장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문재인정부의 한국에 그 활력, 도전정신은 쇠잔해가는 게 안타까워 1만명도 넘은 인파가 그의 영전에 나타났으리라. 근래 이런 장례식은 없었다. 대우의 사세는 1998년 전 세계 기업에서 18위(포천), 한국에서 삼성 다음 2위로 돼 있었는데 대우에 생(生)의 길은 없었을까.
대우가 쓰러져 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 두 권 나와 있다. 2012년에 나온 이헌재 당시 금감원장의 '위기를 쏘다'와 2014년 신장섭 교수가 김우중 회장과 나눈 '대화'이다. '대화'에서 김 회장은 정부가 대우를 일부러 해체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며 억울해한다. '위기를 쏘다'에서는 당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다고 정리했다. 당시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우만 선별 지원했더라면 IMF가 용납지 않아 대한민국이 망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누구 말이 맞을까.
한국이 IMF에 들어간다는 발표가 1997년 11월 21일이고, 구제금융 200억달러를 신청하기로 깡드시 총재와 임창열 부총리가 사인한 게 12월 3일이다. 깡드시는 무례하게도 당시 대선후보 김대중·이회창·이인제 3인에게 당선되면 IMF와 합의사항을 준수한다는 서명을 받아냈다. IMF 조건은 콜금리 25%, 부실 은행 및 종금사 퇴출 등이었다. 달러 환율은 12월 23일 1963원으로 치솟았고 CP 금리는 38%였다. 실업자가 97년 50만명, 98년 150만명이나 쏟아져 나왔다. 98년 GDP가 -5.5%였으니 통곡의 계절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김우중 회장부터 찾았다. 김 회장은 금 모으기 아이디어를 내서 227t을 모아 22억달러에 수출하게 한 공도 세웠다. 청와대에서 경제장관회의 때 DJ는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그의 역할을 부여했다. DJ가 김우중 회장 의견을 들으라고 하자 한번은 김중권 비서실장, 강봉균 수석 3인이 호텔에서 만나 해결책을 모색한 일이 있었다. 김 회장은 환율이 뛰었으니 수출을 늘리면 500억달러 흑자를 금방 달성해 IMF 돈을 갚고 그렇게 되도록 금융, 기업을 독려하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강 수석이 "지금 시대는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고 시장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자 김 회장은 "그러려면 시장이 있는데 경제수석은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느냐"고 힐난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경제부처 회의를 사실상 주재하며 "일을 못하겠으면 방해 말고 비켜달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다.
실제로 재벌을 통할하며 돈줄을 쥐고 구조조정을 지휘한 책임자는 이헌재 금감위원장이었다. 알려진 대로 이 위원장은 김 회장과 세계를 누비며 대우에서 상무로서 3년 정도 상하 관계로 근무한 적이 있다. 책을 보면 김 회장의 성격이 불같은데 하필이면 강봉균·이헌재도 절대로 누구에게도 밀릴 성격이 결코 아니다. 김 회장은 정부에 밉보여 강제 해체당했다는 식의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어쩌면 강봉균·이헌재라는 원칙주의자들의 마음을 너무 할퀴고 크리티컬(critical)한 순간 조력자가 되기보단 반대로 엇나갔을 수도 있다.
왜 김 회장이 그랬을까. 그의 비즈니스 커리어를 보면 짐작이 간다. 김 회장의 부친이 박정희 대통령을 가르친 은사였고, 부실기업 인수를 모두 그에게 맡겼다. 세계 경영이라고 하지만 동구권·아프리카 등지의 세계 경영 대상국은 거의 후진 독재국이었다. 후진국 킹(King)이나 대통령을 통하면 만사오케이였고 심지어 DJ도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해줬지 않은가. 장관은 그저 대통령의 시종으로 보였을 것이다.
◆구조조정 지시 무시한 김우중
한국이 IMF에 들어가자 은행에 외화자금이 말라붙어 L/C(Letter of Credit·신용장) 개설이 안되고 수출금융 융통이 안됐다. 97년 말 한국 기업들의 평균 부채비율은 424%, 5대 그룹 평균은 518%로 나와 있는데 대우그룹만 따로 몇 %인지 확인은 잘 안되는데 아마 삼성·현대 등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정부는 200% 밑으로 부채비율을 떨어뜨리라는 황급한 지시를 내렸다. 김우중 회장은 IMF는 정부가 금융을 잘못 다스려 초래한 재앙인데 왜 기업더러 구조조정을 하라고 하느냐며 수출 증대로 인한 한국 회생을 주장하며 구조조정 지시에 소홀했다. 98년 구조조정 이행률을 보면 삼성·현대가 100%가 넘었는데 대우는 18.5%였다.
IMF에 들어가기 직전 쌍용차를 인수해 회사 덩치와 부채를 더 키워 구조조정을 하기는커녕 반대로 갔다. 왜 그랬을까. 김 회장은 GM에 50% 지분을 50억~70억달러에 팔면 유동성 문제가 한방에 해결될 것으로 본 것 같다. 김 회장은 IMF에 들어가기 전인 97년 5월 GM 측에서 합작 제의를 해 98년 2월 2일 양해각서를 맺고 협상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98년 7월 협상이 가격 문제로 결렬됐다고 이헌재 장관의 책엔 기술돼 있다. 금리는 높고, 환율은 천정부지이며, 구조조정은 하나도 안 한 촌각을 다투는 GM이 등을 돌리니 사실상 여기서 대우의 생명은 경각으로 몰렸다.
대우그룹은 총차입금이 97년 말 28.7조원에서 98년 9월 말 47.7조원으로 19조원이나 증가했다. 은행에서 돈을 안 빌려주니 회사채 8조원, CP 12.3조원 등 무섭게 비싼 자금을 썼다. 회사채, CP 금리가 30% 수준이라면 무엇을 수출한들 30% 이상 순익을 낼 수 있었을까. 여기서 발행한 회사채, CP는 투자신탁의 채권펀드에 편입돼 수많은 국민에게 팔려나간다. 그것은 독이 든 과일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98년 10월 회사채 발행 한도를 그룹별로 제한하는 조치를 내리는데 대우는 이미 한도를 크게 오버하고 있었다. 이 조치를 보고 노무라증권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렸다"는 보고서를 10월 29일 한국인 애널리스트 고원종을 통해 낸다.
그보다 두 달 전인 8월 고향이 호남인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취임했는데 그는 청와대가 시킨 인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취임하자마자 대우그룹 여신을 마구 회수하기 시작하자 이헌재 장관이 불러 간접적으로 만류했다. 그러나 김 행장은 듣지 않았다. 이를 본 삼성생명이 대우에 빌려준 돈을 회수하고 이것이 신호탄이 돼서 단자 종금사 너 나 할 것 없이 대우의 돈줄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강봉균 수석은 11월 DJ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 핵심 내용은 대우를 도우려 했으나 실상을 너무 모르고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은 상태라는 것. 취재 과정에서 김정태 행장이 이헌재 장관의 말도 안 듣고 회수를 강행한 게 어디서 무슨 사인을 받은 것인지 내겐 가장 미스터리였다. 김 행장이 타계하고 없고 이헌재 장관은 "아무 말도 않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IMF에 들어간 지 정확히 1년 후 대우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것이며 그 후 1년은 산소호흡기를 대고 연명한 데 불과했다. 이헌재 장관의 '위기를 쏘다'를 보면 98년 12월경 '대우는 사실상 디폴트 상태'라는 보고가 올라와 은행장, 제2금융권 사장단에게 당분간 연장(roll over)을 해주라며 대우를 살리려 애썼다.
이번엔 삼성 빅딜이 일말의 희망으로 다가왔다. 98년 11월 김종필 총리(JP)가 삼성-대우를 중매하는 빅딜 아이디어를 냈다. 삼성엔 삼성차가 골치이고, 대우는 대우전자가 골치이니 서로 주고받아 난관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건희-김우중 회장이 빅딜 일로 99년 1월과 3월 두 차례 만나 악수하고 사진 찍고 했다. 돈줄이 급한 대우 측은 3조5000억원을 달라고 했고, 삼성은 한 푼도 못 준다고 하여 6월에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두 그룹 간 빅딜 협상을 하는 중에도 시장에선 "대우가 워크아웃에 간다더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아 증시가 폭락하고 더욱 돈줄이 막혔다. IMF에 들어가고 1년6개월 만인 99년 4월 19일 힐튼 대우조선 등을 팔아 9조원을 마련한다는 때늦은 발표에 시장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개월 후인 7월 19일 김우중 회장이 사재 1조3000억원 등 총 13조원을 마련해 유동성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강봉균 수석은 구조조정 후 김우중 회장의 대우그룹 지분은 제로가 되며 대우는 워크아웃에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하자 주가가 71포인트 폭락했다. 연말까지 은행 상환액만 10조원이 도래할 참이었다. 이 무렵 김 회장은 런던으로 출국했고 거기서 음독자살한다는 루머가 퍼졌다.
강봉균 수석이 대우 보고서를 DJ에게 보고하고 회사채 발행마저 막히자 뇌혈관 수술을 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몸으로 베트남 순방 중인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러 하노이로 떠난다. 그리하여 12월 15일 아침 대통령 부부와 조찬을 하면서 무역금융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렇지만 이 청탁은 거절당한다. 김 회장은 DJ와 통화(99년 10월 11일)했는데 "잠시 해외에 나가 있어라"고 하여 출국하게 됐다고 '대화'에서 밝혔다. 당시 DJ는 "8개 계열사는 경영하게 해주겠다"고 김 회장에게 약속해줬지만 결국 허언이 됐다고 주장한다. 그해 6월 16일 정주영 현대 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을 하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는 마당에 미국의 눈치를 볼 입장이 됐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의 5대 재벌이 구조조정이 약하다고 지적해 청와대는 김우중 회장의 요청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을 확인할 김 대통령, 강봉균 수석은 타계하고 없다. 김우중이 떠나고 난 후 금감원 실사에서 대우그룹 부채는 89조원, 자산은 59조원으로 30조원 부족으로 최종 발표가 있었다(대우 측은 자체 조사로는 5조원 흑자라 주장). 이 정도 큰 부실은 정권 차원에서 특혜로 덮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김 회장의 킹(King)과의 담판 습성이 사태를 그르치게 한 것 아닐까.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DJ가 재벌을 손봐줄 의지가 확고해서 그것이 대우의 운명에도 영향을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위기를 쏘다'에 LG-현대 간 반도체 빅딜을 다루는 부분이 있다. 여거시 DJ는 재벌사업 교통정리에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저자는 표현한다. 그 결과는 LG, 현대 두 그룹 모두에 불행한 결말을 짓고 만 것으로 정리돼 있다.
세 번째 미스터리는 왜 김우중은 구조조정을 안 하고 버텼느냐는 점이다. 삼성·현대도 100% 숙제를 한 구조조정을 대우는 끝까지 버텼다. 금리 30%, 환율 1600원이 외화부채가 유독 많은 대우의 생명을 잠식했다. 그동안 대우차 빅딜을 GM이나 삼성이 즐겼을 가능성마저 있다. 대우의 거버넌스는 감히 김 회장에게 반론을 제기할 참모가 없었다. 그게 문제였던 것 아닐까. 김우중은 영국 베트남 등지를 전전하다가 5년7개월 만인 2005년 6월 24일 귀국해 재판에서 17조원 추징을 받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김세형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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