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동양화가 말을 걸다]“친구 집 대문 앞에서 돌아선 까닭은” - 양기성 섬계회도

바람아님 2014. 1. 24. 12:27
양기성 ‘섬계회도’ 종이에 색, 33.5×29.4cm. 일본 대화문화관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되는 사람인데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어 편지를 썼다. 그때 냉정했던 모습은 진실이 아니었노라고, 오랜 시간 당신만을 생각하며 살았노라고 구구절절 애타는 심정을 담아 장문의 편지를 썼다. 쓰는 동안 감정이 격해졌다. 격한 감정을 순화시키려 애를 썼지만 글은 웅변조로 변해갔다. 아무리 많은 말을 써 넣어도 마음을 다 담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쯤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편지를 부쳐야지. 들뜬 기분으로 달콤한 잠에 빠졌다.
   
   결국 그 편지는 부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읽어 보니 너무 유치했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분명 스스로가 읽어봐도 감동적일 만큼 잘 쓴 편지였는데 환한 아침에 읽어 보니 아니었다. 오로지 내 감정에 빠져 폭포처럼 쏟아낸 말들이 왠지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이런 편지를 보내려 했다니. 큰일날 뻔했다. 안타깝지만 밤새 쓴 편지는 휴지통에 버렸다. 메일이나 카톡 같은 통신수단에 익숙해지기 전 세대라면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흥이 올라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
   
   왕자유(王子猷·338?~386)가 산음현(山陰縣)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밤새 큰 눈이 내렸다. 잠에서 깬 그는 술 생각이 간절했다. 하인을 부르려 방문을 열었는데 사방이 온통 은빛이었다. 천지에는 눈이 가득 쌓였고 달빛마저 맑고 차가웠다. 술이 아닌 눈에 취한 그는 마당을 서성이며 좌사(左思·250?~305?)의 ‘초은시(招隱詩)’를 읊조렸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 대안도(戴安道)가 보고 싶어졌다. 대안도는 산음현에서 가까운 섬현(剡懸)에 살고 있었다. 그는 곧장 그 밤에 작은 배를 타고 친구를 찾아 나섰다. 하룻밤이 지나서 도착한 그는 친구의 대문 앞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않은 채 돌아섰다. 곁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이 의아해서 물었다. 왕자유가 대답했다.
   
   “나는 본래 흥(興)이 올라서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간 것이니, 어찌 반드시 대안도를 만나야만 하리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얘기다. 양기성(梁箕星·?~1755)의 ‘섬계회도(剡溪廻棹)’는 왕자유가 대안도의 집에까지 왔다 대문 앞에서 되돌아가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화첩의 왼쪽에는 ‘세설신어’의 내용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섬계(剡溪) 위의 배 안에는 사공과 두 명의 승객이 타고 있다. 친구 집 대문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왕자유와 ‘곁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이리라. 이야기의 중심이 왕자유의 ‘회도(廻棹)’에 있는 만큼 대안도의 집은 대문만 보여주는 식으로 간략하게 그렸다. 대신 밤새 내린 눈을 강조하기 위해 천지를 ‘설백(雪白)’으로 처리했다. 군데군데 서 있는 을씨년스러운 나무에서 겨울 추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눈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린 폭설은 아니다. 왕자유의 잠을 깨워 대안도의 집에 올 때까지만 내린 눈이다. 대문 곁의 바위와 뒷산 골짜기에 살짝 드러난 녹색이, 눈이 그다지 두껍지 않음을 말해준다. 눈이 내리는 동안 ‘흥이 올라서 왔다가’ 눈이 그치자 ‘흥이 다해 돌아간’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가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왕자유는 진(晉)나라 때 시인 왕휘지(王徽之·338?~386)로 자유(子猷)는 그의 자(字)다. 서성(書聖)으로 알려진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이다. 왕휘지가 찾아간 친구 대안도는 대규(戴逵·325~396)를 일컫는다. 안도(安道)를 자(字)로 쓴 대규는 학문이 해박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거문고를 잘 탔다. 왕휘지와 대규는 소광(疏廣), 도잠(陶潛), 소강절(邵康節)과 함께 후대 사람들에게 본받고 싶은 ‘다섯 현자(五賢)’로 선정된 유명인이다. 이들의 일화가 굳이 그림의 주제로까지 그려지게 된 배경에는 후대인들의 흠모의 마음이 있었음이다. 후대의 추종자들은 왕휘지의 평전을 찾아 읽는 것은 물론 그가 읊었던 좌사의 ‘초은시’까지 찾아서 읊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온갖 기이한 광경
   
   ‘섬계회도’는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장첩되어 있는 작품이다. ‘만고기관첩’은 당시 사람들이 애송하던 시문(詩文)과 그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이루어진 서화합벽첩(書畵合璧帖)이다. ‘만고기관(萬古奇觀)’, 즉 ‘이 세상의 온갖 기이한 광경’이라는 뜻이 말해주듯 이 화첩 속에는 유명한 시인과 문사(文士), 명상(名相)과 현신(賢臣)의 고사(故事)가 글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서화합벽첩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여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꾸준하게 제작되었다. ‘만고기관첩’뿐만 아니라 ‘천고최성첩’ ‘사공도시품첩’ ‘현원합벽첩’ ‘표옹선생서화첩’ 등 다양한 형식의 서화첩이 유행했다. 그중에서도 ‘만고기관첩’은 궁중에서 정조가 열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8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도화서 화원들 장득만, 장계만, 한후방, 한후량, 양기성, 진재해 등이 대거 제작에 참여한 중요한 서화첩이다. 특히 양기성은 ‘섬계회도’를 비롯하여 이 서화첩의 가장 많은 그림을 담당하였다.
   
   ‘만고기관첩’은 동일한 제목의 화첩이 삼성 리움미술관과 일본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다. 두 화첩 속에 담긴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당시 문인이 갖추어야 할 지식과 소양, 사대부로서 지켜야 할 교훈적 내용을 시각자료로 만든다는 근본 취지는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만고기관첩’에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담겨 있다. 당시 사람들이 지향했던 문인들의 세계, 지키고자 했던 삶의 품위, 여유와 풍류가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상대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즐기고 자족할 줄 아는 자의 멋과 운치가 느껴진다.
   
   
   내 감정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은 좋은 일이다. 누군가를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에게 가 닿을 때도 좋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좋은데 상대방한테는 짐이 되고 거북하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감정이 아니다. 이기적인 것이다. 그건 사랑도 아니고 순정도 아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주는 마음이 있다면 밤새 쓴 편지를 휴지통에 버릴 수도 있다. 친구집 대문 앞까지 왔다 되돌아갈 수도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굳이 여러 권의 화첩을 만들어 다 아는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남겼다. 행여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아름다운 삶의 덕목을 되새기며 실천하자는 뜻이었다. 좀이 슬어 군데군데 해어진 낡은 그림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토커를 넘어 사생팬(사생활을 쫓는 팬)까지 등장하는 우리 시대에 답답하게만 보이는 옛 사람들이 그리운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사랑을 아는 순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옛그림에서 사랑과 배려를 배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