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기자회견 중인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코로나19로 기로에 서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 남자 때문에 일본 경제는 파멸할 것이다.” 세계적 투자가인 짐 로저스가 지난달 10일 일본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남자’는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다. 로저스는 일본의 경제 정책에 대해 수년간 공개적으로 날 선 비판을 해왔다. 돈만 풀어댔을 뿐 재정 적자, 산업 경쟁력 등 근본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공격이었다. 경제 정책에 있어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구로다 총재는 한 몸과 다름없다. ‘아베노믹스’의 집행관이자 후원자가 구로다 총재다. 아베 총리가 실패로 끝난 총리 1기 집권(2006~2007) 이후 절치부심 뒤 2012년 총리 2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일본은행 총재로 점찍었다. 중앙은행 수장과 정치 지도자는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 지도자가 경기 부양을 통해 정치력을 높이고자 할 때, 물가·통화 관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중앙은행 수장은 무리수를 두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 의장에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미쳤다” 등 원색 비난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2018년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가 의회에 출석해 경제 정책에 대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그 뒤로 아베 신조 총리와 아소 다로 부총리의 모습이 보인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구로다 총재와 아베 총리는 찰떡궁합에 가깝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구로다 총재가 입버릇처럼 한 말은 “(아베노믹스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한다”였다. 일본은행 총재(임기 5년)의 연임은 흔치 않은데, 구로다는 예외다. 2013년 취임한 뒤 2023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았다. ![]()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해 미국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특별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를 지낸 국제경제통이기도 하다. AFP=연합뉴스 구로다와 아베의 오작교를 놓아준 인물은 아베노믹스의 설계자, 하마다 고이치(浜田宏一) 예일대 명예교수다. 하마다는 일본 언론에 “중앙은행이 돈을 제때 풀지 않아서 일본 경제가 거덜났다”거나 “정부가 재정적자를 떠안더라도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양적완화(QE)를 하지 않는 중앙은행 총재는 “지저귀지 않는 카나리아”라고 깎아내렸다. 그런 하마다가 구로다를 아베 총리에게 천거했다. 천거 당시 구로다 총재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였다. 그의 이력서엔 2005년부터 맡아온 ADB 총재직을 2013년 3월18일 부로 사임하고 이틀 뒤부터 일본은행 총재를 맡고 있다고 돼 있다. ![]() 구로다 총재(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지난해 후쿠오카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자들과 환한 표정으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와 제롬 파월 미국 Fed 의장,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 등이 보인다. 후쿠오카는 구로다 총재의 출신지다. EPA=연합뉴스 코로나19로 일생일대 위기 맞은 구로다그런 그에게도 코로나19 위기 극복은 만만치 않은 과제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달 27~28일 금융정책 결정회의를 주재했다. 단골 멘트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더 비장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그가 인생의 목표로 설정한 아베노믹스의 성공이 흔들리고 있어서다. 그는 추가 금융 조치로 국채 매입 상한 한도를 없앴고, 기업어음(CP)과 회사채 구입 상한액도 3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상장지수펀드(ETF) 매입 목표액을 두 배로 늘린 데 이은 추가 조치다. 일본은행이 직접 나서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해 돈줄을 뚫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 지난달 27일 일본 도쿄 일본은행 앞을 마스크를 착용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짐 로저스의 생각은 다르다. 일본은행의 지속적인 유동성 확대가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일본이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너무 오래 돈을 풀어 코로나 19 같은 경제위기에 대응할 카드를 소진해버렸다는 지적에 공감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그동안 일본은행은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제로 금리를 처음으로 도입한 곳도, 국채를 사들이는 QE 프로그램을 시작한 곳도 일본이다. 통화량을 조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기준금리 상향(0.25%)은 미국의 '닷컴 버블'로 도루묵이 됐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마이너스 금리(-0.1%)로 이어졌다. ![]() 일본의 분기 성장률은 지난해 4분기에 -1.8%까지 떨어졌다. 이미 경기침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코로나19, 아베노믹스의 화살을 부러뜨리다구로다 총재의 통화 정책은 양적 완화, 재정 지출, 구조 개혁을 지향하는 아베노믹스를 충실히 따라왔다. 이를 두고 ‘3개의 화살’이란 말도 나왔다. 한때 장기 불황 탈출의 기대가 부풀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다. 일본은행은 최근 2022년 물가상승률을 0.4~1.0%로 전망했다. 아베노믹스의 과녁(물가 상승률 2.0%)에서 크게 벗어난 수치다. 2분기 경제 성장률이 -30%까지 추락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4번째 화살'이라던 도쿄 올림픽은 올해 개최가 물 건너 갔다. 아베도 구로다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라는 복병 때문이다. ![]() 2015년 기자회견 장에서 괴로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구로다 총재. 로이터=연합뉴스 엘리트 꽃길만 걸어온 책벌레구로다 총재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 섰다. 그는 정통 엘리트 경제 관료로 꽃길만 걸어왔다. 후쿠오카(福岡)현 출신으로 일본에선 ‘토다이’로 불리는 도쿄(東京)대 법대를 졸업해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재무성에서 일하다 ADB 총재로 국제경제통으로도 입지를 굳혔다. 일본의 봄 연휴인 ‘골든 위크(4월말~5월초)’, 그는 뭘 했을까. 아마도 서재에서 책에 파묻혀 있을 공산이 크다. 그의 취미는 독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부터 베스트셀러 작가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의 추리소설 등을 즐겨 읽는다. ![]() 원래는 이렇게 잘 웃는 인물. 취미는 독서와 가부키 감상이다. AP=연합뉴스 일본은행이 발행하는 계간지 2016년 가을호엔 그와 미야베 작가의 대담이 실렸을 정도다. 대담에서 미야베 작가는 그에게 "내 작품을 이렇게 깊게 해석해주다니 영광이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 한 지인은 일본 언론에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항상 책을 읽는 책벌레”라며 “공무원이긴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관도 구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금융정책결정회의 후 기자회견을 하는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나 물러서진 않았다. 그는 “당분간 일본 경제는 어렵겠지만, 내년엔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고수했다. 골든 위크의 서가에서 그는 의지를 현실로 바꿀 답을 얻었을까. 새롭게 돌파구를 찾아낼지, 로저스의 말대로 일본 경제를 파멸로 이끌지,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