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돈이(周敦頤)
물과 땅에서 나는 꽃 중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다(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晉陶淵明獨愛菊)
이씨의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몹시 사랑했으나(自李唐來 世人甚愛牡丹)
나는 홀로 연꽃을 사랑한다(予獨愛蓮之)
진흙 속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고(出於淤泥而不染)
맑은 물 잔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고(濯淸漣而不妖)
속은 비었으되 밖은 곧아(中通外直)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도 없으며(不蔓不枝)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 깨끗하게 서 있으니(香遠益淸 亭亭淨植)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다룰 수는 없다(可遠觀而不可褻翫焉)
나는 말하겠다(予謂)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요(菊花之隱逸者也)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요(牧丹花之富貴者也)
연은 꽃 중의 군자라고(蓮花之君子者也)
아(噫)!
국화에 대한 사랑은(菊之愛)
도연명 이후에는 들은 적이 드물고(陶後鮮有聞)
연꽃에 대한 사랑은(蓮之愛)
나와 같은 이가 몇 사람인고(同予者何人)
모란에 대한 사랑은 많을 것이 당연하리라(牡丹之愛宜乎衆矣)
▲ 강세황 ‘향원익청’ 종이에 색, 52.5×115.5cm, 간송미술관 |
‘주돈이’라는 이름의 무게
주돈이는 북송(北宋)의 대유학자이자 송나라 유학의 비조(鼻祖)다. 그는 유교의 토대를 마련하고 체계화하였는데 성리학(性理學)의 기본이 되는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오행(五行)이 만물 속에서 생성발전되는 과정을 도해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저술했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재창한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형제와,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1130~1200)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네 사람은 중국 송대의 4현(四賢)으로 칭송받으며 현재까지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있다. 주돈이는 자가 무숙(茂叔)으로 중국 강서성의 여산(廬山)에 있는 염계(濂溪)에서 염계서당을 짓고 살아 주렴계(周濂溪)라고도 한다.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그린 ‘향원익청(香遠益淸)’의 제시에서도 역시 ‘염계’라는 호로 주돈이를 칭하고 있다. 제시는 이렇다.
‘염계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꽃은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다룰 수는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린 연꽃 역시 멀리서 보는 것이 좋다”고 하겠다. -표암(濂溪先生謂蓮可遠觀不宜褻翫余則曰畵蓮亦宜遠觀焉. 豹菴)’
그림 ‘향원익청’에는 두 포기에서 자란 꽃과 잎사귀가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다. 세로로 긴 그림은 한여름 연못에서 어린아이 키만큼 웃자란 연꽃의 긴 줄기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형식이다. 앞쪽의 연꽃은 활짝 핀 상태로, 그리고 뒤쪽의 연꽃은 봉오리를 오므린 상태로 그려 연꽃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묘사했다. 한 줄기에서 솟아오른 널찍한 연잎 또한 앞면과 뒷면을 엇갈리게 표현하여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특히 백련임에도 불구하고 흰색 연꽃잎의 끄트머리에 붉은색을 찍어 발라 한껏 운치가 묻어난다. 배경에 흐릿하게 등장하는 수초와 뿌리 부분에 듬성듬성 펼쳐진 어린 연잎도 한여름 연못의 싱싱함을 전해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물며 연잎 위에 기어 오른 청개구리까지 발견하게 되면 금세라도 연꽃 아래서 퐁당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실감난다. ‘향원익청’은 주돈이의 ‘애련설’에 대한 흠모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성 있는 그림이지만 그 뜻을 무시하고 감상용으로만 한정해서 본다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이다.
강세황은 조선 후기 남종화풍을 주도한 사대부 화가이다. 각 서체에도 능했을 뿐만 아니라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같이 서양화풍을 수용한 작품도 남겼다.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작품에는 예외 없이 표암의 그림 평이 따라붙을 정도로 평론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하고는 32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강세황은 자를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노죽(露竹)이라 했는데 특히 표암이란 호를 즐겨 썼다. ‘표암(豹菴)’은 강세황이 태어날 때부터 등에 있던 흰 얼룩무늬가 마치 표범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향원익청’에서도 표암이라 썼다. 표암 대신 ‘표옹(豹翁)’이라 칭할 때도 있었다.
이름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 강세황 ‘자화상’ 1782년(70세), 비단에 색, 88.7×51cm, 국립중앙박물관 |
오늘 이 글은 주돈이의 애련설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진짜는 따로 있다. 바로 강세황이다. 먼저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부터 감상해보자. 이 작품은 강세황이 70세 때 그린 전신 좌상으로 매우 특이한 형식을 하고 있다. 옷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데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평상복을 입었으면 정자관을 쓰거나 유건이나 방건을 쓰는 것이 정상이다. 관모를 썼다면 관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관모에 평상복이라니. 강세황은 무슨 까닭으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을까? 그에 대한 의문은 머리 높이로 양쪽에 적어 넣은 찬문을 보면 풀린다. 찬문에는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이 조정에 있다(於以見心山林 而名朝籍)’고 적혀 있다.
강세황은 평생 야인으로 살다 61세가 되는 1773년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영의정을 지낸 고관대작의 아들이 백면서생으로 늙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영조의 배려 때문이었다. 관직은 볼품없었다. 무덤을 관리하는 9급 참봉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병조참의와 한성판윤을 지냈다. 10년 동안에 이뤄 낸 고속승진이었다. 이 ‘자화상’을 그릴 당시에 그는 호조참판을 거쳐 가의대부(종2품)에 올랐다. 허리에 묶은 붉은 띠가 당상관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잘나가던 그가 ‘이름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조선시대 초상화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을 제작했다. 비록 지금은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어느 시골 구석에서 이름 없이 살았던 시절을 잊지 않겠노라는 다짐이다. 이 얼마나 갸륵한 자기성찰인가. 강세황은 자화상을 4점이나 남겼다. 그만큼 자의식이 강했으며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엄정함이 강했던 사람이다. 강세황은 ‘향원익청(香遠益淸)’을 그릴 자격이 있는 선비다. 오염된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오직 자신만이 청정한 척 기염을 토하는 사람들 속에서 출세한 뒤에도 행여 자신의 행동에 진흙이 묻어 있지 않을까 반성하고 또 반성했던 강세황 같은 선비가 그리워진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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