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賈島)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松下問童子)
스승은 약초 캐러 가셨다 하네 (言師採藥去)
다만 이 산 속에 계시지만 (只在此山中)
구름 깊어 계신 곳 모른다 하네 (雲深不知處)
▲ 장득만 ‘송하문동자도’, ‘만고기관첩’ 중, 18세기, 종이에 색, 38.0×30.0cm, 삼성미술관 리움 |
팔당대교를 지나고 두물머리를 지나 한참을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려가 보니 용문산 끄트머리에 그의 집이 있었다. 지붕 높이만큼 자란 보리수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집이었다. 마당과 밭을 가득 메운 보리수나무는 다닥다닥 붙은 붉은 열매들로 가지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복분자, 앵두는 농익다 못해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짐을 부려 놓기가 무섭게 보리수를 따기 시작했다. 이번 주가 지나면 나무에 달린 열매들이 모두 산속에 사는 새들 차지가 될 것이라 했다. 나를 부른 이유였다. 절반은 먹으면서 절반은 바구니에 담으면서 밭에서 반나절을 보내노라니 어느새 점심때가 다 됐다. 그제야 내 곁에서 상추, 오이, 쑥갓을 따며 점심 준비를 하는 친구 곁이 허전해 보였다.
“네 남편은 왜 안 보여?”
인사가 너무 늦었다 싶어 멋쩍게 물었다.
“응. 저 산에 약초 캐러 갔어. 단오 전에 캐야 하는 약초가 있다면서 도시락 싸가지고 올라갔으니까 저녁때나 되어서 내려올 거야.”
걱정도 안 되는 듯 친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은자는 어디 갔나
- ▲ 김홍도 ‘월하고문’, 종이에 연한색, 27.4×23cm, 간송미술관
수은(睡隱) 장득만(張得萬·1684~1764)이 그린 ‘송하문동자도(松下問童子圖)’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779~843)의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해(尋隱者不遇)’의 첫 구절을 화제 삼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전경에는 은자(隱者)가 사는 집 앞에 두 사람이 서 있고, 후경에는 구름에 휩싸인 우람한 산이 배치되어 있다. 전경의 집과 소나무 그리고 손님의 질문에 산을 향해 손짓을 하는 동자의 모습은 마치 잘 꾸며진 무대 세트처럼 정교하다. 그림을 보면 시가, 시를 읊조리면 그림이 저절로 이해될 만큼 시와 그림이 서로 협조적이다. 그림만 봐도 시가 떠오를 만큼 그림이 삽화처럼 설명적이다.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 이게 전부인가? 차라리 그림을 빼고 시만 보여주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뭐, 이런 아쉬움에 자꾸 중얼중얼하게 된다.
곱게 색칠하고 꼼꼼하게 그린 그림을 굳이 ‘설명’이라는 단어로 폄하한 까닭은 그림이 시의 세계를 전해주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누군가를 만나려면 사전에 약속을 잡고 조금만 늦어도 양해를 구하고 서로가 합의된 시간에 방문해야만 결례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에게 기껏 스승님의 행방을 알려준다는 소리가 험준한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진정한 은자의 모습을 보여준 가도의 시 세계가 장득만의 그림에서는 잘 녹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분초(分秒)를 따지며 현대를 사는 내게 ‘산속에 계시지만 구름 깊어 계신 곳 모르는’ 가도의 시 세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유유자적해서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득하기만 하다. 그 아득함의 세계를 장득만은 시 표면에 드러난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간단히 보여주었다. 그림 보는 사람의 수준이 너무 낮다고 생각한 탓인지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으로 감상자의 생각할 여지마저 대신해 주었다. 잔소리가 많은 까닭에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느껴지는 칡뿌리 같은 여운은 사라져 버렸다. 장득만은 조선 후기의 화원으로 왕의 어진(御眞)을 그릴 정도로 초상화에 뛰어난 작가였다. 그런 기량을 가진 작가가 왜 그랬을까.
‘퇴(推)’로 할 것인가 ‘고(敲)’로 할 것인가
이 그림은 왕실 자재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제작한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그 때문에 작가의 예술적 기량을 드러내기보다는 가도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보조자료로서의 그림에 적합하도록 제작했다. 장득만이 굳이 예술성에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설명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만고기관첩’이 지닌 교육용 교재로서의 의도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영화에서 조연들이 주연을 돋보이도록 최대한 자신들의 끼를 죽이고 감추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주연보다 더 많이 사랑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 현상이 단지 모든 존재가 가치 있다는 인식이 보편화된 우리 시대만의 특징일까. 장득만이 살았던 시대에는 힘들었을까.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해서 보더라도 장득만의 ‘송하문동자도’는 가도의 시 위에 살만 입혔을 뿐 그 안에 뼈대를 세워 혼을 불어넣는 데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더구나 가도는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민다(僧推月下門)’는 시구(詩句)를 쓰면서 ‘퇴(推)’와 ‘고(敲)’ 중 어떤 글자가 적합할 것인가 고민하다 결국 ‘퇴고(推敲·글을 다시 읽어가며 다듬고 고치는 일)’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니 그의 시 세계는 허깨비 같은 천학(淺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융숭하지 않은가.
김홍도의 작품 ‘월하고문(月下敲門)’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다’는 뜻의 ‘퇴고(推敲)’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 스님이 등장한 것은 ‘퇴고’를 고민하던 때 가도가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의 명문장 한유(韓愈)의 권유로 환속하여 시인으로 살았다.
용문산 정상에 석양빛이 짙어질 때까지, 보리수의 붉은빛이 어둠 속에 잠길 때까지도 산에 간 친구 남편은 내려오지 않았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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