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王維)
홀로 깊은 대숲 속에 앉아 (獨坐幽篁裏)
거문고 타고 긴 휘파람 분다 (彈琴復長嘯)
깊은 숲을 아무도 모르는데 (深林人不知)
밝은 달만 와서 비춘다 (明月來相照)
▲ 김홍도 ‘죽리탄금도’ 종이에 먹, 22.4×54.6㎝, 고려대학교박물관 |
시선(詩仙)은 이태백(李太白·701~762), 시성(詩聖)은 두보(杜甫·712~770). 그렇다면 시불(詩佛)은 누구일까. 산수 자연을 노래한 청아한 시와 담백한 그림에 모두 뛰어나 자연 시인이자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시조(始祖)로 불리는 왕유(王維·701~762)를 일컫는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그의 자가 마힐(摩詰)인 것도 불교 경전인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따왔다. 그는 대대로 관리를 배출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9살에 시를 지었으며 진사 합격을 시작으로 벼슬살이에 나섰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협박에 못 이겨 관직을 맡았다. 난이 진압되자 그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 다행히 아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불교에 더욱 심취해 평생 향을 피우며 불교 경전을 읽었다. 31살에 부인과 사별한 후 평생 홀로 산 그는 병약한 어머니를 위해 장안(長安)에서 멀지 않은 종남산(終南山)에 망천(輞川) 별장을 사들였다. 제법 운치 있는 은거생활을 할 수 있는 호화스러운 별장이었다. ‘죽리관에서’는 망천 별장에서 지은 시로 별장 근처의 20여가지 경물을 노래한 ‘망천집(輞川集)’에 실려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망천장은 절에 희사했다. 시불(詩佛)다운 행동이었다.
외로움을 친구 삼아 대숲에 앉으니
이곳에 들어온 지 몇 해던가. 번화한 도시에서 먼 곳이다 보니 매사가 한가롭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얽매인 일도 없으니
새소리가 들리면 느지막이 일어나 게으른 아침을 먹고, 가끔씩 책을 보다 지치면 호수를 건너 언덕에 오른다. 정오의 해가 푸른 이끼 위에 노을빛으로 물들도록 숲 속은 고요해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말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자취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나는 오늘도 홀로 깊은 대숲 속에 앉아 거문고를 뜯는다. 잔잔하던 바람도 적막해서 댓잎을 건드릴 때쯤이면 나도 덩달아 휘파람을 불며 고요함을 즐긴다. 이도저도 지쳐 무료해질 즈음 보름달이 찾아와 친구처럼 어두운 마음을 비춰준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리고 싶었던 생활인가.
왕유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가 붓을 들어 그의 생활을 상상해서 그렸다. ‘죽리탄금도(竹裡彈琴圖)’는 왕유가 망천장에서 누린 유현하고 탈속한 경지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시인은 대나무 숲에 앉아 둥근 달빛을 받으며 거문고를 타고 있고 뒤쪽에서는 동자가 등을 돌리고 앉아 차를 끓이고 있다. 앞쪽에는 큼지막한 바위가 놓여 있어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시인의 삶을 지켜주는 듯하다. 거문고 소리, 휘파람 소리, 차 끓이는 소리, 보름달이 무거워 댓잎 기우뚱하는 소리…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림을 그림으로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김홍도는 오른쪽 위 공간을 시원하게 비워놓았다. 빈 공간을 통해 사람의 심성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자연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홀로 지내는 시인의 즐거움을 빈 공간의 끝에 적어두었다. 제시에 적힌 마음은 왕유의 것이자 김홍도의 것이다. 김홍도 또한 왕유가 ‘망천집’을 지을 때와 비슷한 나이인 50대 초반에 연풍현감을 그만두고 그림 속 시인처럼 풍류적 생활을 즐겼다. 차이가 있다면 여유로운 시인이 자신의 별장으로 내려가 넉넉한 고독을 즐겼다면, 궁핍했던 화가는 옛 삶터로 돌아가 시끄러움 속의 고요를 즐겼다는 것이다.
시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시
북송대 소식(蘇軾·1036~1101)은 왕유의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를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칭찬했다. 그만큼 왕유의 시는 회화성이 뛰어나다.
조선 후기에는 송시(宋詩)보다 당시(唐詩)를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사람들은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송시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 회화적인 당시를 선호했다. 그중에서도 왕유와 두보의 시는 가장 시인과 화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화가들은 시의도(詩意圖)를 그릴 때 시구의 한두 구절만을 적는 경우가 많은데, 김홍도는 ‘죽리탄금도’에서 시 전문을 적어 넣었다. 그림을 부채에 그린 선면화(扇面畵)인 까닭에 부채질하듯 서늘한 바람이 성성한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것 같다. 그 바람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초가을 처서(處暑)의 기분 좋은 바람이다. 딱 이맘때쯤인 것 같다. 한여름 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처서가 돼서야 하늘의 달도 쳐다보고 거문고 가락에 마음을 튕겨볼 여유가 생기지 않겠는가.
이쯤 되면 아무리 마음이 각박한 사람도 세상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진다. 가지 끝에 달린 목련꽃이 산 속에서 어지러이 붉은 봉오리를 터뜨릴 때, 배꽃이 나부껴 섬돌가 풀밭에서 바람 따라 가볍게 휘날릴 때, 가을비에 생긴 여울이 돌에 부딪혀 튀어 오를 때 그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계절을 세 해 정도 보내고 나면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그리워진다. 그리움이 목까지 차올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때쯤 붓을 들어 시를 쓴다. ‘죽리관에서’라는 시가, ‘죽리탄금도’라는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왕유는 병이 위중한 어머니를 위해 망천장을 구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는 3년 동안 망천장에 칩거하며 시를 썼다. 마치 어머니가 시인인 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시가 탄생할 수 있는 장소로 손을 이끌어준 것 같다. 이백과 왕유의 생몰 연대를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 두보는 이들보다 11년 후에 태어났다. 한 시대에 한 명의 거장도 얻기 힘들거늘 ‘시의 신선(詩仙)’과 ‘시의 부처님(詩佛)’과 ‘시의 성인(詩聖)’이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경이롭다. 이런 대가들을 한 시대에 불러 모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홀로 있는 즐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넉넉함에서 나온 건 아닐까.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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