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125] 주문자 요구대로 만들어진 '독특한 그림'

바람아님 2014. 4. 15. 10:04

(출처-조선일보 2014.04.12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15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 루뱅 최고 화가였던 디르크 바우츠(Dieric Bouts ·1415~1475)의 '최후의 만찬'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예수 그리스도는 체포되기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 식사를 하면서 배신자를 지목하고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었다. 
기독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인 만큼 '최후의 만찬'을 그린 수많은 성화(聖畵)가 있지만 그 대부분은 예수가 배신자를 
밝히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바우츠처럼 예수가 빵을 든 장면을 그린 건 대단히 예외적이다.

예수가 축복을 내리는 순간 빵은 곧 그의 살, 즉 성체(聖體)가 되고, 포도주는 그의 피가 된다. 
이처럼 빵과 포도주를 통해 그의 희생을 기리는 의식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진 성체성사(聖體聖事)다. 
그런데 바우츠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외적으로 배신자가 아니라 성체를 강조한 것은 그가 그렇게 주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디르크 바우츠, 최후의 만찬 작품 사진
디르크 바우츠, 최후의 만찬, 1464~68년, 목판에 유채, 
180×150㎝, 벨기에 루뱅의 성 베드로 성당 소장.
1464년 성체를 통한 신앙을 강조했던 루뱅의 기독교 단체 '성례전(聖禮典) 형제회'는 성 베드로 성당에 제단화를 봉헌하기로 
하고 바우츠와 주문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계약서에는 그림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상(圖像)의 
정확성을 위해 루뱅대학 신학 교수 두 사람의 이름을 명기하고 이들에게 자문을 하는 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 화가는 완성작을 양도하며 만족스러운 금액을 받고 영수증에 직접 서명을 남겼다.

그림 속 뒤편의 작은 창을 통해 최후의 만찬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과 테이블 옆에 엄숙하게 서서 시중을 드는 두 사람, 
이들이 바로 그림을 주문한 이들의 모습이다. 
이처럼 미술사의 많은 작품은 사실은 작가와 주문자의 협업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