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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슬로씽킹, 로스 존스턴 '엘니뇨: 역사와 기후의 충돌'

바람아님 2014. 9. 9. 08:18

( 출처-조선일보 2014.09.06)

빨리 처리하라, 망하고 싶거든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진 현대인, 근본적인 해결 없이 사태만 악화시켜

천천히 생각하는 12가지 방법 제시


	슬로씽킹 책 사진
슬로씽킹
칼 오너리 지음|박웅희 옮김|쌤앤파커스
411쪽|1만5000원

제약회사들은 '즉시 치료된다'는 약속을 판다. 정치도 다이어트도 그렇다. "내년까지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보다는 "한 달 안에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더 달콤하다. '서두름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다. 성직자도 피해 갈 수 없는 중독이다. 오스트리아의 마르틴 슐라크 몬시뇰은 이 책에서 고백한다. "최근에 나도 기도를 너무 빨리하고 있어요."

영국 저널리스트 칼 오너리는 전작 '느린 것이 아름답다'에서 현대사회의 속도 숭배에 제동을 걸었다. 이번 책은 속편과 같다. 비즈니스, 정치, 교육, 환경, 인간관계, 건강 등에서 우리가 의존하는 임시변통의 해결책 '퀵픽스(quick fix)'를 버리고 정반대 '슬로픽스(slow fix)'로 나아가야 한다며 12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핵심은 '슬로씽킹', 즉 '천천히 생각하기'다.

우리는 빨리 걷고, 빨리 말하고, 빨리 먹고, 빨리 사랑하고, 빨리 생각한다. "현대는 효과 빠른 요가와 1분 잠자리 동화의 시대"라고 오너리는 진단한다. 클릭이나 터치 한 번으로 작은 기적을 일으키는 기계에 길든 사람들은 세상만사가 소프트웨어의 속도로 흘러가기를 기대한다. 미국 교회는 차에 탄 채로 진행되는 드라이브스루(drive-thru) 장례식을 실험하고 있다. 바티칸은 스마트폰 앱을 통한 고백으로는 대속(代贖)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요구될 때 퀵픽스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2005년 미국 텍사스에 있던 브리티시 페트롤륨(BP)의 정유공장이 폭발했다. 이듬해에는 알래스카 해안의 BP 송유관에서 두 차례 기름이 유출됐다. 최고경영자가 "이번엔 땜질 처방으로 끝내지 않겠다"고 발표했지만 그때뿐이었다. 2010년 BP의 석유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에서 폭발이 일어나 11명이 사망했고 기름이 유출돼 환경 재앙으로 이어졌다.


	기사 관련 사진
getty image/멀티비츠
퀵픽스는 일시적으로 통증을 가라앉히지만, 원인을 뿌리 뽑지는 못한다. 되레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오너리는 "속도가 빨라야 유리한 비즈니스에서도 우리의 퀵픽스 사랑은 심한 역효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기업이 풍랑을 만나면 흔히 다운사이징을 택하는데, 직원을 서둘러 떨쳐내어 성과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기업을 공동화(空洞化)하고 남은 직원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고객과 납품업체를 놀라게 할 뿐, 진짜 문제는 방치된다.

이 책은 영국 공군, 노르웨이 교도소, 도미노피자, 페덱스 등이 '슬로씽킹'으로 난제를 푼 사례를 소개한다. 천천히 생각하기는 과오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들은 점들을 연결해 전체를 보는 접근법을 택했고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서로 협력했다. 창의성은 무엇보다 잠복기가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부글부글 솟아오르기까지 문제 속에 잠길 시간 말이다. "모든 일에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이 시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가장 어려운 길이 장기적으로 가장 쉬운 길이라는 것"이라는 문장이 뻐근하다.

빠른 것이 더 낫다는 통념에 저항하는 '슬로 무브먼트'는 달팽이처럼 살자는 게 아니다. 모든 일을 느리든 빠르든 상관없이 걸맞은 속도(최상의 결과를 내는 속도)로 하는 것이다. 인내심 교육은 서두름 바이러스를 막는 예방접종이 될 수 있다.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진단과 처방에는 수긍한다. "내가 아주 똑똑해서가 아니라, 단지 문제들을 더 오래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에 밑줄을 쫙 그었다.            (박돈규 기자)




[이덕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 그 인간을 지배한 건 기후

(출처-조선일보 2014.09.06 이덕환 서강대 교수)


	'엘니뇨: 역사와 기후의 충돌' 책 사진
로스 존스턴 '엘니뇨: 역사와 기후의 충돌'
 
전남 해남의 친환경 간척 농지에 갑자기 수억 마리의 흉측한 풀무치 떼가 나타나 
주민들이 혼비백산한 모양이다. 시커먼 몸통에 날개가 채 돋지 않은 어린 
풀무치들이었다. 크게 덥지도 않았고, 마른장마가 가을장마로 이어졌던 올여름의 
유별난 날씨 탓이라고 한다. 장맛비에 씻겨 내려갔어야 할 알들이 제 세상이 
왔다는 착각에 부화해버린 것이다. 순진한 풀무치들이 비정상적인 날씨에 깜빡 
속아서 생긴 일이었다.

우리 형편도 풀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날씨가 규칙적인 순환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우리의 삶과 역사의 물길은 통째로 흔들리게 된다. 
다큐멘터리 작가 로스 존스턴의 '엘니뇨: 역사와 기후의 충돌'(새물결)에 따르면 그렇다. 
실제 인류의 역사는 가뭄·폭우·태풍·폭염·한파·폭설과 같은 극한 기후에 의한 고난의 역사였다. 
명과 청의 몰락도 가뭄에 의한 기근 때문이었고,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혹독한 추위에 무너졌다. 
1876년부터 3년 동안 이어진 끔찍한 가뭄은 사람 고기를 사고파는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물론 극한 기후로 이익을 챙기는 쪽도 있었다. 페루 연안의 어부들이 어획량 감소로 고통을 받게 하던 
해류의 변화가 내륙의 농부들에게는 풍작에 필요한 풍족한 비를 가져다주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뜻밖의 폭우 덕분에 잉카 정복에 성공했고, 19세기 말 중국의 가뭄은 서구 열강에 더없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수많은 전쟁·정복·혁명·멸망·대이주가 대부분 변덕스럽고 혹독했던 날씨 탓이었다. 
우리가 과학기술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해왔다는 인식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셈이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 사진
 이덕환 서강대 교수

그렇다고 과학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은 아니다. 페루 연안에서 크리스마스 
전후로 가끔 나타나는 '엘니뇨'(아기 예수)라는 국지적 해류가 전 지구적인 극한 
기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 바로 과학이었다. 극한 기후는 
바다와 대기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비평형 상태의 거대한 순환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과학기술의 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과 땅이 
어질지 않다(天地不仁)'는 노자의 말을 외면할 수 없는 형편이다.

과학을 알아야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요즘 관심이 높아진 
빅히스토리(거대사)가 바로 그런 노력이다. 하찮은 형이하학 정도로 여겨지던 과학이 인문학의 핵심인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