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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119주기 특집①] 일본낭인배 새벽5시 명성황후 기습 시해

바람아님 2014. 10. 11. 09:38
1895년 美이브닝스타, 생생 보도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은둔의 왕국' 조선의 왕궁에서 경악할만한 사건이 터졌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낭인' 무뢰배들이 궁궐에 쳐들어와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들은 명성황후를 발가벗겨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등 인간으로선 차마 못할 극악한 짓을 자행했다.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은둔의 왕국’ 조선의 왕궁에서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전한 세계 언론의 보도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고 드라마틱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주변 4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조선의 왕궁에서 벌어진 치열한 외교전과 음모, 술수 등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다뤄 눈길을 끈다. 사진은 1895년 10월14일 워싱턴의 이브닝스타지 보도. 2014.10.07. <사진=美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은둔의 왕국’ 조선의 왕궁에서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전한 세계 언론의 보도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고 드라마틱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주변 4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조선의 왕궁에서 벌어진 치열한 외교전과 음모, 술수 등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다뤄 눈길을 끈다. 사진은 1895년 10월13일 워싱턴의 모닝타임스. 2014.10.07. <사진=美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은둔의 왕국’ 조선의 왕궁에서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전한 세계 언론의 보도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고 드라마틱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주변 4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조선의 왕궁에서 벌어진 치열한 외교전과 음모, 술수 등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다뤄 눈길을 끈다. 사진은 1895년 10월13일 워싱턴의 모닝 타임스. 2014.10.07. <사진=美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은둔의 왕국’ 조선의 왕궁에서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전한 세계 언론의 보도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고 드라마틱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주변 4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조선의 왕궁에서 벌어진 치열한 외교전과 음모, 술수 등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다뤄 눈길을 끈다. 사진은 1895년 10월14일 워싱턴의 이브닝스타지 보도. 2014.10.07. <사진=美의회도서관 DB> robin@newsis.com

 

119년전 세계 각국의 미디어들은 낯선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을 한결같이 대서특필하며 시해 사건을 '세기의 사변'으로 주목했다. <뉴시스 2014년 3월22일 송고기사 참조>

당시 세계 언론의 보도는 한 세기도 더 지난 시절의 언론으로 믿어지지 않을만큼 상세하고 드라마틱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주변 4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조선의 왕궁에서 벌어진 치열한 외교전과 음모, 술수 등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다루고 서방의 관점에서 시해사건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영어권 미디어로 가장 먼저 사건을 보도한 것은 뉴욕타임스다. 시해가 발생한지 나흘이 지난 1895년 10월12일 워싱턴발로 1면에 '서울의 격동의 사건들(Seoul's Turbulent Affairs)'이라는 큰 제목과 '조선 왕비(Corea's Queen) 암살 추정, 왕과 일행 피신'이라는 작은 제목으로 '세기의 사건'을 보도했다.

그러나 이번 발굴에서 사건 이틀 만인 10월10일 서울에서 한 특파원이 생생한 기사를 보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워싱턴DC의 이브닝스타는 '왕비의 죽음'이라는 기사에서 사건 전말을 전하고 명성황후 시해가 일본의 음모임을 강력 시사하며 향후 조선의 운명까지 가늠하는 놀랄만한 분석기사를 소개했다.

◆ 뉴욕헤럴드 서울특파원 사건 이틀만에 전말보도

이 기사는 뉴욕헤럴드의 동방특파원 존 코코일이 서울에서 송고한 것으로 1차수신지인 도쿄에서 보도금지됐다가 우여곡절끝에 10월14일자로 보도된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일본 낭인배들이 습격을 결행한 시간은 새벽 5시였다. 또한 이들이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일본 군대가 궁궐밖을 지키며 방관한 사실 또한 언급됐다.

"10월 8일 화요일 오전 5시. 서울의 궁궐은 일단의 조선 군인들과 민간복 차림의 일본인 낭인들의 공격으로 파괴됐다. 이들의 궁궐 진입을 막으려던 경비대장(홍계훈)은 살해됐고 많은 경비대원들도 도륙됐다. 일본 낭인들은 왕비의 침소를 공격해 왕비와 세명의 궁녀, 내부대신을 살해했다. 이들은 시신을 궁궐밖에 끌고와서 불에 태웠다. 그러는동안 일본의 군대가 궁궐앞에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원군은 공격직후 궁에 들어와 권력을 잡았으며 음모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본 정권이 들어서면서 왕비의 일파는 체포되거나 달아났다. 선왕의 후비가 어제밤(10월9일) 살해됐다. 고종은 퇴위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요크타운 함대와 러시아 함대는 제물포(인천)로 이동하고 있다. (조선의) 민심이 격동하고 있다. 잔인한 학살이 러시아의 행동을 서두르게 만들고 있다."

이브닝스타는 같은 날 '조선의 반란, 폭도들 왕비 살해'라는 5단 제목 기사에서 왕(고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왕의 아버지(대원군)가 권력을 다시 쥐게 됐다는 내용을 전했다.

이어 '독재선포'라는 기사에서 "폭도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군대가 왕궁 문을 지키고 있었다. 일본 대신이 이 음모를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새로운 내각은 친일본 인사로 구성됐다. 일본인 낭인들은 살해혐의로 체포됐다"고 덧붙였다.

신문은 '폭도들 사이의 일본인'이라는 중간제목 보도에서 "폭도들 중엔 일본 옷을 입고 일본도를 착용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엔 일본인으로 위장한 조선인들로 추정됐으나 그들은 일본인 낭인으로 밝혀졌다. 일본정부는 철저한 조사를 명령했고 요코하마의 검사장이 조선에 파견돼 조사를 하고 있다. 왕비는 죽은 것으로 믿어지며 정권을 잡은 대원군이 왕비를 후궁으로 격하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전했다.

워싱턴DC에서 발행되는 모닝타임스는 이브닝스타에 하루 앞선 10월13일 1면에 '조선 왕비의 운명, 카펜터 제독, 암살소문 보고받아'라는 보도에서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카펜터 제독의 전문이 어제 도착했다"며 경천동지할 뉴스를 전재했다.

이튿날에도 영국의 더타임스 기사를 인용하여 속보를 내보냈다. '혼돈에 빠진 조선(Chaos reigns in Korea)' '왕비와 수행원들 왕궁에서 잔혹하게 살해돼' '우리(미국) 함대 발진'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 1882년 명성황후 독살기도 사건 눈길

10월16일 유타의 유력지 솔트레이크헤럴드는 워싱턴발 기사로 "아직 공식 확인이 되지 않고 있지만 조선 왕비의 살해라는 비극적 사건엔 정치적 동기가 숨어있다. 일부 관리들은 왕비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사건은 1882년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을 되새겨준다. 당시에도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려했다"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1882년 사건'은 대원군과 대립하던 민씨 세력이 암살당하고 명성황후마저 시해하는 음모가 꾸며졌을 때 이를 미리 안 명성황후가 변장을 하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죽음을 모면한 내용이다. 솔트레이크헤럴드는 당시 암살을 모의한 이들이 명성황후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1895년 10월19일 워싱턴의 풀먼헤럴드는 요코하마발로 10월11일 입수한 소식을 전한다. "코우로마 백작이 조선 수도 서울에서 최근 일어난 반란 사태를 보내왔다. 조선의 왕비는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주도한 반란세력에 의해 살해됐다. 무장군인들이 궁궐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왔다."

10월25일 버지니아의 하이랜드레코더도 '한국의 반란, 왕비 살해된듯' 기사에서 "가공할 조선의 반란은 왕비의 사망 실종 사망 추정과 미 함대의 진주로 이어졌다. 미 함대는 16일 요크타운을 떠나 조선에 갔고 영국 함대도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어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관계와 일본의 낭인배들의 범행을 보도했다. "왕비는 신식군대를 싫어했다. 그러나 일본의 영향으로 조선 군대는 현대적 시스템으로 신식무기가 지급됐다. 대원군은 신식군대의 지휘를 허락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낭인들이 왕비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은 명목상의 왕이며 실제로는 왕비가 통치하고 있었다."

11월25일 영국의 프레스어소시에이션(PA)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사주로 시해됐으며 13명의 궁녀들이 무참하게 살해됐다고 시드니발로 보도했다.

PA는 '조선 왕비 암살, 궁녀 13명도 피살'이라는 제목으로 "암살된 조선왕비와 13명의 궁녀들이 살해된 사건에 일본이 연루되었다. 약 200명의 조선 군인들이 일본 낭인들과 궁궐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왔다. 궁녀들과 한 명의 시종을 살해한 후 왕비는 암살됐다. 반역자들은 시신들을 불태웠다"고 끔찍한 참상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