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10.14 김광일 논설위원)
경찰이 자동차 정지선 단속을 펼쳤다. 교차로 꼬리 물기도 함께 붙잡았다.
단속이라지만 계도(啓導)에 신경을 많이 썼다.
자동차 멈춤선을 어긴 운전자에게 경찰관이 다가가면 첫 반응이 대개 이렇다.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 다들 어기잖아요."
이 운전자에게는 자신이 교통법규를 어겼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6만원짜리 딱지 떼이는 게 억울하다면 정지선 법규를 물고 늘어져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남들도 어기는데 왜 나만 붙잡느냐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나'와 '교통법규'의 관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들과 경찰관을 들먹이는 핑계가 똬리를 튼다.
엄마가 고교생 아들의 스펙을 조작했다. 엄마는 교사도 매수했다.
엄마가 고교생 아들의 스펙을 조작했다. 엄마는 교사도 매수했다.
그렇게 엉터리로 만든 가짜 스펙을 들이밀어 입학사정관을 속이고 아들을 대학에 넣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게 드러나 경찰에 불려온 엄마가 말했다.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 지금 강남 한번 가 보세요.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요."
스펙 조작 엄마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아들이 평생 지녀야 할 윤리 의식을 뿌리부터 뽑아버렸다는 죄의식도 없다.
자신도 학생을 가르치는 대학 강사라는 점까지 잊었다.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따지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만 남았다.
우리 행동과 의식 속에 '물귀신 DNA'처럼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라는 반응은
우리 행동과 의식 속에 '물귀신 DNA'처럼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라는 반응은
한국 사회를 낙후시키는 고질병처럼 들러붙어 있다.
행동 주체로서 '내'가 규범에 맞는 시민인지는 아랑곳없다.
속고 속이는 복마전 세태 속에서 혹시 나만 재수없이 걸려든 것은 아닌지에만 관심 있을 뿐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여러 TV 코미디나 드라마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흉내 내는 성대 모사가 유행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여러 TV 코미디나 드라마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흉내 내는 성대 모사가 유행했다.
비자금 환수를 패러디하면서 '왜 나만 갖고 그래' 하고 비아냥댔다. 비자금을 만든 전직 대통령이 나만 있느냐,
검은돈을 만진 사람이 나만 있느냐, 왜 사정기관과 언론은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볼멘소리였다.
전두환씨가 정말로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성대 모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많은 사람이 그럴듯하다고 공감했기 때문이다.
장관 후보자에게 위장 전입과 다운 계약서 문제를 따지면 마이크 앞에서는 '아내가 한 일이다. 잘못됐다'
장관 후보자에게 위장 전입과 다운 계약서 문제를 따지면 마이크 앞에서는 '아내가 한 일이다. 잘못됐다'
'당시는 관행으로 알고 있었다'고 발뺌한다.
인사청문회가 끝나고 뒷자리 사석에서는 구시렁댄다.
"왜 나만 갖고 그래? 다들 하잖아."
술기운이라도 오르면 오히려 핏대를 낸다. "서울에서 자식 키우면서 위장 전입 안 한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한 국책연구원 원장은 법인카드를 허투루 쓴 게 국정감사에서 들통 나자 말했다.
"전임 원장이 그렇게 해서 똑같이 해도 되는 줄 알았다."
스펙 엄마, 법인카드 슬쩍 국책연구원장, 위장 전입 후보자들은 남과 전임자 탓을 하지만 뭔가 오해하고 있다.
스펙 엄마, 법인카드 슬쩍 국책연구원장, 위장 전입 후보자들은 남과 전임자 탓을 하지만 뭔가 오해하고 있다.
대부분 사회 구성원은 스펙 조작, 위장 전입, 법인카드 슬쩍과는 무관하게 살아왔다.
우리 사회의 멈춤선을 밟고선 그들이 비겁하게 둘러대는 억지 소리를 애들이 들을까 겁난다.
궁색하고 창피하다.
다른 사회 구성원을 물고 들어가는 물귀신 추태는 이제 역겹다.
어디다 대고 지금 "다들 그런다"고 말하는가. 그런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