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도시에서도 쑥을 캐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해운대 신시가지의 뒷산은 장산이다.
아파트를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곧 산으로 접어든다.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을 때에도 볕이 드는 곳은 제법 따뜻하다.
천변 양지 바른 쪽에는 쑥 캐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그림 같다. 쑥 캐는 사람이 보이면 ‘이제 봄이로구나.’ 하는 상투적 감탄사를 다시 발하게 된다.
이처럼 나물을 캐는 모습은 언제나 정겹게 느껴진다.
위의 그림에도 그런 조용한 정겨움이 있다.
나물은 매일 먹는 것이지만, 정작 나물이 무엇인가 물으면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하기야 일상적인 것, 너무나 익숙한 것을 물으면 원래 답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나물은 먹을 수 있는 식물이다. 그것은 나무일 수도 있고, 채소일 수도 있다. 뿌리, 잎사귀, 줄기 어느 것도 다 나물이 된다.
다만 생것 그 자체로는 나물이 아니다. 가공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삶거나 생것이거나 참기름과 간장, 된장 따위의 조미료를 넣어 무쳐야 나물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산과 들에서 나는 푸새와 길러서 얻는 남새를 한국 사람처럼 다양하게 가공해서 먹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서양의 샐러드는 나물에 비하면 그 종류와 가공의 다양성이 한참 모자란다.
●“고려 사람들 도축 서투르고 조리법 형편없어”
나물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기가 맛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고기는 맛도 있고 또 에너지도 높다.
하지만 고기는 귀한 것이다. 고기와 곡물의 교환비율은 6대1 정도 된다.
즉 곡물 6㎏을 가축에게 먹이면 고기 1㎏이 생산되는 것이다. 고기가 부족해서 나물을 먹게 되었던 것인가.
이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이유도 있다.1123년 고려에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짐승을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양이나 돼지를 잡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서투르고 조리법 역시 형편 없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식생활을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고기를 먹는 것은 아주 드물었고, 반찬의 주류가 채소,
곧 나물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다면 무슨 나물을 먹었을까.
허균은 1611년 ‘도문대작 (屠門大嚼)’이란 글을 쓴다.‘도문대작’이란 푸줏간을 지나면서 입을 쩍쩍 다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먹었던 맛있는 떡과 과실, 새와 짐승 고기, 수산물, 그리고 채소를 소개한다. 그는 고사리·아욱·콩잎·
부추·미나리·배추·송이·참버섯·가지·외·호박·무는 어디서나 나고 맛이 좋다고 쓰고 있다.
그 외에 특별한 채소로 죽순·원추리·순채·석전·요목·표고·홍채·황각·청각·참가사리·우뭇가사리·초시(椒)·삼포(蔘脯)·여뀌·동아·
산개자·다시마·올미역·김·토란·생강·겨자·파·마늘 등은 어떤 산지의 것이 특별히 맛이 있노라고 소개하고 있다.
양념류도 섞여 있지만, 대부분은 나물이다. 실로 다양하다.
●맑은 식생활과 청렴한 삶의 상징
앞에서도 말했듯 나물은 고기와 대립하는 것이다. 나물은 곧 청렴한 생활의 상징이었다.
한석봉의 시조는 이렇게 말한다.
“짚 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희야 박주 산채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달빛이 뜰에 가득한 밤이다. 짚으로 짠 방석조차 필요 없다.
낙엽에 앉으면 그만이다. 관솔불도 켜지 마라, 달빛이 내려앉지 않느냐?
이때 한 잔 탁주가 없을 수 없다. 안주는 산나물이면 그만이다.
이처럼 나물은 맑은 생활의 상징이다.
나물은 유쾌한 식품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은 ‘천진암에서 놀고 난 뒤 기념으로 쓴 글’에서 나물을 먹은 모임을 회고한다.
1797년 여름 다산은 형제와 일가들과 어울려 집과 가까운 소내로 가서 천렵을 한다.
그물을 쳐서 크고 작은 고기 50여 마리를 잡는다.
고기가 얼마나 실했으면,“작은 배가 고기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이 몇 치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그 고기를 일행은 배불리 먹는다.
다산은 일행에게 “옛날 진나라 장한은 벼슬을 하다가 자기 고향 강동의 농어와 순채가 생각나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습니다.
물고기는 우리가 맛을 보았고, 지금은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이니, 어찌 천진암으로 가서 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제안한다. 이 말에 형제 4명과 일가 3,4명이 천진암으로 향한다. 글을 직접 읽어보자.
산으로 들어서자 초목이 울창하였다.
산 속에는 가지가지 꽃이 만개하여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고,
온갖 새들이 목구멍을 울려 맑고 매끄러운 소리를 주고받았다.
길을 가면서 새 소리를 듣고 서로 돌아보며 몹시 즐거워하였다.
천진암에 이르자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며 하루를 보냈고,
사흘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은 시는 모두 20여 수고, 먹은 산나물은 냉이·고사리·두릅 등 모두 56종이었다.
다산 일행은 사흘을 머물고 무려 56종의 나물을 먹고 돌아온다.
아, 유쾌한지고. 화목한 가족과 일가가 모여 강과 산을 찾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산채를 먹으며 보내는 여름 한 철은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세종 때도 “나물캐는 백성 들판 뒤덮어”
이처럼 나물은 청빈한 삶의 상징이었고, 또는 다산의 경우처럼 가족과 함께 소박한 행복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나물은 굶주림과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나물을 캔다는 것은 곡식이 바닥이 나서 굶주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던 것이다.
세종 시대는 조선조 500년 동안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음에도 굶주리는 사람이 허다하였다.
‘세종실록’ 26년(1444) 4월27일조를 보면, 진무(鎭撫) 김유율·박대손 등은 지방 여러 곳을 돌아본 뒤 돌아와서
“쌓아 둔 곡식은 많아야 1,2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적은 사람의 경우 1,2되 밖에 없었고, 혹 다 먹어버리고 남은 것이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한다.
기근이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덧붙여 나물만 먹는 자도 있으며, 부종이 난 사람도 있었다고 보고한다.
이어 23일 병조판서 정연은 청안 지방의 일부 사람들은 나물만 캐서 먹고 있는 실정이라는 자신의 목격담을 보고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나물을 캐는 백성이 들판을 뒤덮고 있으며 먹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물뿐’이라는 것이다.
나물에 의지하여 사는 백성들의 처참한 삶은 조선후기로 올수록 점점 더하였다.
정약용은 ‘다북쑥을 캐다’(采蒿)란 시에서 그 처참한 삶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 넘어가네/ 푸른 치마 붉은 머리/ 허리 굽혀 쑥을 캐네/ 다북쑥 캐어 무얼 하나/ 눈물만 쏟아지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엔 벼 싹 다 말랐네/ 다북쑥 캐어다가/ 둥글게 넓적하게/ 말리고 또 말려서/ 데치고 소금 절여/ 죽 쑤어 먹을밖엔/ 달리 또 무얼 하리”
(송재소 역 ‘다산시선’, 창작과비평사) 조선후기 나물 캐기와 백성들의 처참한 삶의 관계를 이처럼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그림 속의 여인들이 캐는 나물은 청빈의 상징인가, 아니면 가난의 상징인가,
아니면 가족과 함께 먹을 단란한 저녁식사의 찬거리인가. 바라건대 맨 마지막의 것이었으면 한다.
지금 세상의 나물은 가난도 아니고, 청빈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채식이 인간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물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부합하는 즐거운 채식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