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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선조 vs 도요토미 히데요시③

바람아님 2015. 6. 12. 10:16

(출처-조선일보 2015.06.05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한반도, 분단의 위기를 넘기다

현재 한중일 3국에서 공유되는 임진왜란 7년에 대한 인식에는 큰 공백이 있다. 
1592년 4월 전쟁 발발부터 대략 1년 동안의 대규모 충돌 기간 이후 1597년 7월에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기까지의 4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마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전선이 남과 북으로 어지러이 오고 간 시기에 대해서는 인구에 회자되지만,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나 거제 포로수용소 폭동 사건 이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3년 전쟁 중 1951년 7월 ~ 1953년 7월 사이 2년 간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임진왜란의 경우에도 4년 간 강화 협상이 전개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강경한 입장의 남한 정부가 협정 체결에 반대한 것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정부도 강화 협상에 반대했다.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명나라 측의 의도와, 
한반도 남부 4개 도의 점령을 승인받고자 한 일본 측의 의도가 충돌하면서 강화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과 차이가 있다.

1592년 6월에 조선 국왕 선조가 의주에 도착하여 사태의 긴급함을 호소하자, 
그때까지 조선이 일본과 협력하여 자국을 침략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명나라 정부는 7월에 원군 파병을 결정한다. 
그리고, 군대가 준비될 때까지 시간을 벌 목적으로 심유경을 파견하여 일본과 협상을 하게 한다. 
이 심유경이라는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비난이 거세어서인지, 한중일 삼국의 문헌에서 그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다. 
류성룡이 '징비록' 말미에 심유경에게서 받은 편지를 수록하고 논평한 것이 그나마 가장 우호적인 내용이다. 
“이 편지를 보면 한양을 되찾을 때까지의 일은 명백하여 증명할 수 있지만, 
적이 부산으로 후퇴한 뒤의 일은 말만 그럴듯할 뿐 숨기는 것이 많다. 
그러나 공(功)과 죄는 저절로 드러나는 법이니, 훗날 심유경을 논하는 사람은 이 편지를 근거로 하여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편지를 여기에 적은 이유이다”('교감 해설 징비록' 652쪽).

심유경과 고니시의 협상 장면 상상도. 1853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에혼 조선정벌기” 권1. 해군사관학교 소장.▲ 심유경과 고니시의 협상 장면 상상도. 
1853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에혼 조선정벌기” 권1. 
해군사관학교 소장.

1592년 8월 17일에 조선에 들어온 심유경은 
9월 1일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회견을 갖는다. 
전쟁의 전망을 밝게 보지 않은 고니시는, 더 이상의 전쟁 지속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두 사람은 50일간의 휴전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당시 고니시의 심정을 전하는 일본측의 문헌으로 '요시노 진고자에몬 비망록'이라는 것이 있다. 
고니시 군에 소속되어 있던 병사가 남긴 종군기록인 이 문헌에 따르면, 심유경과 고니시 간에 50일간의 휴전이 합의된 
이후 일본군은 심한 곤궁을 겪었다고 한다. 
“여러 다이묘들은 평생 겪어본 적 없는 굶주림 때문에 마르고 지치고 얼굴빛은 검어졌고, 
술을 못 마시니 마음 달랠 길도 없었다”('문헌과 해석' 63호).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 장군들에게도 
외국에서의 전쟁은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사이에 명나라 정부에서는 10월 16일에 이여송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동시에 명나라는 심유경을 통한 기만전술을 계속하여 펼쳤다. 
11월 26일에 심유경과 고니시가 재차 회담을 갖고 휴전 기간을 연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회담 다음 달인 12월 25일에 이여송 군은 압록강을 건넜고 1593년 1월 6일 평양을 탈환한다. 
평양성 전투에서는 명나라 군이 주도적으로 승리를 이끌었으나, 
뒤이어 펼쳐진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이여송 군에 승리하면서 한양을 확보한다. 
그러나 2월 12일에 한양 근처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조선군이 승리하면서 한양의 안전이 위협받자,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로의 퇴각을 결정한다. 
명, 일본, 조선이 각각 한 차례씩 승리를 주도한 이 1593년 1월~2월이 지난 회에 살펴본 1592년 5월의 임진강 공방전 
이후 임진왜란의 두 번 째 전환점이 된다. 
물론 조선 수군의 지속적인 승리가 그 배후에 존재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자국을 침공하려 한 일본군을 조선에서 저지하는데 성공한 명나라는, 다시 고니시를 보내 심유경과 협상하게 한다. 
1593년 3월 7일, 고니시는 심유경이 다시 속임수를 쓸 것임을 알면서도 다시 강화 협상에 응한다. 
'요시노 진고자에몬 비망록'에는 고니시가 이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적이 오늘 쳐들어올지 내일 쳐들어올지 기다리며 매일같이 군사회의를 열었다. 
정월 하순 무렵부터 어느새 삼월이 될 때까지 모두들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군량미도 떨어졌으므로 버틸 수가 없었다. 
이미 대세는 정해졌다고 포기하기 시작했을 무렵 유격장군이 개성에서 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유격장군을 만나 사정을 상세히 들으니, 유격장군은 또 강화를 논했다. 
고니시는 이 제안이 진실되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략) 그리하여 4월 말일 귀국길에 올라 13일에 부산포에 도착했다.“

3월에 열린 한양 회담에서 명과 일본은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명측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군하고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송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고니시 등은 명나라 군도 조선 바깥으로 철군해야 하며, 일본군은 명나라의 사신이 도착하면 그에 따라 차차 
남하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군에서는 사용재와 서일관이라는 장군들을 가짜 강화 
사신으로 정하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파견하기로 했다.

사용재 등이 1593년 5월 중순에 나고야에 도착하자, 히데요시는 원래 명나라를 침략할 의도가 없었다며 애초의 전쟁 목적을 
부정하는 한편, 조선이 일본에 항복하고 일본이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주선해주기로 했었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며 
전쟁 발발의 책임을 조선측에 돌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강화 조건을 제시한다.

①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② 명나라와 일본 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관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③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대신이 통교를 서약하는 문서를 교환한다.
④ 조선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⑤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⑥ 일본은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을 송환한다.
⑦ 조선의 중신이 일본에 영원한 항복을 서약한다.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가운데 명나라와 조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이덕형 등이 1592년에 쓰시마 측과 협상했을 때에도 이런 문제로 협상이 결렬된 바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파는 거짓으로라도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항복하고 일본국왕으로 책봉해줄 것을 청하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 1594년 말 명나라 정부에 
전달했다. 이에 대해 명나라 정부는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책봉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일본측의 협상파 행정관료들이 이 문서와 책봉사의 정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숨겼다고 파악했다. 그래서 명나라가 자신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게 된 히데요시가 
분노해서 명나라의 국서를 찢고 고니시 등을 질책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도리즈 료지, 사지마 아키코 등 최근의 고니시 유키나가 연구자들은 이러한 통설을 부정한다. 
이들은 1593~97년 사이에 이루어진 명나라와 일본 간의 협상 내용을 히데요시가 대체로 파악하고 승인했다고 추정한다. 
히데요시가 분노한 부분은, 일본측이 실력으로 확보했다고 히데요시가 간주하던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명나라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1597~98년 사이에 펼쳐진 정유재란에서 일본군의 주요 작전은 
한반도 남부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도리즈 료지 '고니시 유키나가 - 말살된 기독교 다이묘의 실상').

돌이켜보면 임진왜란 직전에 고니시 등은 조선 측이 통신사를 파견해줄 것을 간청했고, 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가자 
이를 일본에 대한 조선의 항복 사절이라고 히데요시에게 거짓 보고해서 전쟁을 막아보려 했다. 이번에도 이들은 명나라에 
책봉 사절의 파견을 간청했고, 히데요시에게는 명나라가 그의 요구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숨김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키려 했다. 결과적으로 두 번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한편,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거짓 문서가 오고가던 1594년 2월, 조선은 이덕형 등을 통해 심유경에게 강화 반대 의사를 전했다. 
조선으로서는 한반도 분할이 조건에 들어 있는 협상을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궁지에서 벗어난 선조는, 전쟁 초기에 자신이 보여준 행동들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조나 조선 정부에게 명일 양국 간의 강화 협상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은 
없었다. 선조는 과연 명나라 황제가 심유경 등의 협상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느냐고 그를 협박하며 협상을 방해했다. 
전쟁 수행을 주장한 북인 계열과 선조는 합심하여, 더 이상의 전쟁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명일간의 강화 협상을 추인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론적 입장을 취했던 남인 계열을 공격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1598년 11월에 류성룡이 삭탈관직된 것은 
조선의 이러한 난국을 상징한다(이한우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343-345쪽).

선조가 히데요시에게 보냈다고 주장되는 가짜 문서. 가토 기요마사가 임해군과 순화군을 잘 돌보아준 것을 치하하고, 사명대사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가토의 초상을 그리게 해서 남대문 바깥에 사당을 만들고 제사지내고 있다고 적혀 있다. 남대문 바깥의 관우 사당인 관제묘를 모델삼아 위조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원본은 구마모토현 혼묘지 절에 현존한다. “에혼 다이코기” 6편 권1, 개인 소장.▲ 선조가 히데요시에게 보냈다고 주장되는 가짜 문서. 
가토 기요마사가 임해군과 순화군을 잘 돌보아준 것을 치하하고, 
사명대사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가토의 초상을 그리게 해서 남대문 바깥에 사당을 만들고 
제사지내고 있다고 적혀 있다. 
남대문 바깥의 관우 사당인 관제묘를 모델삼아 위조한 내용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원본은 구마모토현 혼묘지 절에 현존한다. 
“에혼 다이코기” 6편 권1, 개인 소장.

조선측은 명일간의 비밀협상을 반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 정부는 사명대사를 고니시 유키나가와 적대 관계였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파견해 
1594년 4월, 7월, 12월 세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중세 동부 유라시아 지역에서는 
중국어(한문)가 외교상의 공용어였으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고 중국어를 잘 하는 
승려들이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이 상례였다. 
더욱이 가토 기요마사는 독실한 불교도였기 때문에 사명대사는 그를 상대하기에 적합했다.

사명대사의 '분충서난록'에는 4월의 1차 회담 모습이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가토 측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일을 의논하려면 고승을 불러 의논하는데 귀국도 또한 고승을 보내온 것은 이 일을 중하게 생각함이라”며 
사명대사를 환대했다. 
가토는 히데요시의 일곱 가지 강화조건을 사명대사에게 보여주며 “심유경과 고니시의 약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일본 군사는 다시 바다를 건너 바로 명나라로 향할 것이다. 이 때를 당하여 조선의 백성들은 한꺼번에 굶주려 죽고 남음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사명대사는, 이런 조건으로는 강화 협상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황은 사명대사가 말한 대로 진행되었다.

1594년 11월에 고니시 조안 등은 히데요시의 거짓 항복문서를 지참하고 베이징에 들어갔다. 
명나라 조정은 이 문서를 사실이라고 간주하고, 12월에 이종성과 양방형을 책봉사로 정하여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이듬해 1595년 1월부터 명나라측은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책봉사를 파견하겠다고 요구했지만, 
일본측은 계속 말을 바꾸면서 책봉사를 점점 한반도 남쪽의 일본군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1595년 10월 10일에 부사 양방형이 먼저 부산에 들어가고, 11월 22일에 정사 이종성도 부산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고니시는 한반도와 일본을 오고가며 강화 협상의 물밑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누군가가 정사 이종성에게 “일본은 화의를 할 생각이 없고, 당신을 인질로 잡으려 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종성은 1596년 4월 3일에 부산에서 탈출했다. 이에 따라 5월 초에 양방형이 정사로 승급되고, 
심유경이 부사가 되었다. 이종성에게 겁을 준 것이 심유경의 계략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하여 1596년 6월 15일에 명나라 책봉사 일행이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고, 뒤이어 8월 8일에 조선의 황신 등이 
통신사 일행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 이 때 히데요시는 명나라 일행은 만나고 조선 사신들은 만나지 않았는데, 
명분은 임해군과 순화군을 풀어준 데 대한 인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적의가 없음을 강조하고 전쟁의 원인을 조선 측에 돌리려는 일본의 속셈이 확인되는 지점이다.

이렇게 조선측을 배제하고 추진되어 온 명일간의 강화협상은, 
1596년 9월 2일에 오사카에서 열린 회담까지는 문제없이 이어진다. 
자신을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명나라 측의 국서 내용을 그 자리에서 알게 된 히데요시가 국서를 찢고 고니시를 질책했다는 
통설은 최근 연구에서 부정되고 있으며, 회담 자리는 온화한 상태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통설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내에서 유통되는데, 히데요시가 명나라의 요구에 대체로 순종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본 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

1800년에 간행된 “에혼 조선군기” 권8에 실린 삽화. 히데요시가 명나라 국서를 찢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이런 속설이 퍼졌다. 개인 소장.▲ 1800년에 간행된 “에혼 조선군기” 권8에 실린 삽화. 
히데요시가 명나라 국서를 찢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이런 속설이 퍼졌다. 개인 소장.

10월에 귀국길에 나선 명나라 일행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 히데요시는, 
한반도 남부 지역 할양이라는 조건을 명나라 측이 거부한다면, 
실력으로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을 재침하겠다고 선언한다. 
애초에 세계 정복을 명분으로 전국의 병력을 동원한 히데요시로서는, 이 정도의 
성과도 없다면 국내 정치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터였다. 강화협상의 실패는 선조에게는 정당성을, 히데요시에게는 정권 존립의 위기를 가져왔다.

명나라에서도 협상 실패는 정권내의 혼란을 초래했다. 
1597년 3월에 심유경 등이 베이징에 도착해서 거짓으로 강화 협상의 성공을 보고했지만, 7월에 일본군이 조선을 재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 정부 내의 강화파였던 석성, 심유경 등은 모두 처벌받았다. 
'명사기사본말' 등의 일부 중국측 문헌에서는, 조선 왕자 임해군도 심유경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려 했지만 
이덕형이 반대해서 무산되었고 이것이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김시덕 '그들이 본 임진왜란' 166쪽). 
강화협상이 무산된 책임을 조선으로 돌리려는 당시 명나라 사회의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이리하여 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정유재란에서는 14만 명의 일본군에 맞서 6만 명의 명나라 군이 전쟁을 주도하는 형세를 띠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임진왜란사' 213-225쪽). 
특히 중요한 것이 1597년 9월 7일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의 직산에서 해생의 명나라군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이 
충돌한 직산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승리하면서 일본군은 경기도 진입에 실패했으며, 조명 연합군은 
그 해 연말에 대규모 공습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전황이 이렇게 되자, 히데요시는 더 이상 전쟁을 추진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인생의 말년을 맞이한 히데요시는, 이 시기에 전쟁을 진두지휘하기보다는 명승지를 다니며 꽃구경하고 다도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관심은 자신이 죽은 뒤에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권력이 어떻게 온존될 수 있을 것인지에 쏠렸다. 
그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들의 미래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이에야스는 당연히 일본내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가신단 가운데 가토 기요마사와 같은 강경파와 
고니시, 이시다 미쓰나리와 같은 행정파 간의 갈등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리하여 맞이한 1600년 9월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강경파 가신단은,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에야스에게 선처를 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에야스 군에 합류했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 빛을 발했던 
히데요시의 용인술(用人術)은 애초에 무모한 목표를 내걸고 시작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파국을 맞이한 것 같다.

이에 반해 선조는 전쟁 초기에 명나라로부터 국왕 교체 압박을 받으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지만, 
차츰 전쟁이 수습되어가자 광해군을 다시 압박하고 류성룡과 같이 전쟁 중에 활동한 유력 관료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전후에는 쓰시마를 정벌하자는 논의를 이끌기도 한다. 
물론 전후의 조선에는 이러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즉위 당시 붕당 정치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던 선조가 임진왜란이라는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선조와 히데요시는 모두 행운과 능력에 힘입어 정권을 차지했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바람에 정권을 존속시키는데 실패한 반면, 
선조는 잇따른 위기 속에서 진정한 정치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