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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피델 카스트로

바람아님 2016. 11. 27. 23:32

[천자 칼럼] 피델 카스트로

한국경제 2016.11.27 18:13

“모두 그렇듯 언젠가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아마도 이 자리가 나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쿠바 공산혁명가 피델 카스트로가 올 4월 전당대회에서 고별사를 한 지 7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90 평생에 52년을 권좌에 있었으니 왕족 아닌 인물로는 세계 최장기 집권 기록이다.


그는 혁명가이자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정책으로 지상낙원을 꿈꿨지만 ‘평등하게 빈곤한’ 사회주의의 낡은 시스템으로 국민을 몰아넣었다. 처음엔 파격적인 복지정책으로 호응을 얻는 듯했다. 그러나 경제가 곧 망가졌다. 사회주의식 집단농장의 생산이 급감하자 농민들은 집단 태업이나 무장봉기에 나섰다. 그는 준군사조직을 만들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소련의 붕괴와 지원 중단으로 사정은 더 나빠졌고 석유 공급이 끊기면서 전력난과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의료 천국이라지만 의사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투자 부족으로 의료품과 시설은 낙후됐다. 지금도 의사 수는 많으나 의료의 질은 낮다. 의사 월급이 40달러밖에 되지 않아 새벽청소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황이다. 택시기사 수입이 의사보다 높다. 환자들의 개인 정보 보호는커녕 의료 과실이 생겨도 어디에 신고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즉흥적인 성격으로 갖가지 기행을 저질렀다. 1960년 유엔 총회에서 4시간29분간이나 연설해 혀를 내두르게 했다. 냄새 나는 작업복을 입고 와서는 미국이 제공한 호텔의 카펫과 이불을 담배로 태우고 유엔 사무총장에게 ‘미국 호텔의 불편함’을 1시간이나 따진 뒤 할렘가의 낡은 호텔로 옮긴 일화도 유명하다. 한때 군복과 시가의 강렬한 이미지를 내세우던 그는 아디다스 추리닝 차림으로 교황과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다.


가족과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다. 사탕수수 농장을 하던 어머니를 찾아가 “인민을 위해 농장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동생과 딸들은 쿠바를 탈출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23세 때 결혼했다가 몇 년 만에 이혼한 첫 부인 외에 4명의 여성과 8명의 자식을 뒀다. 그 외에도 비공식 ‘여친’이 많았으나 사생활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국민들은 뿌연 시가 연기와 재즈로 마음을 달랬다. 최근 들어서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식 패스트푸드점이 생기고, 그곳 여종업원 월급이 150달러나 된다. 이런 변화의 물결은 더 빨라질 것이다. 트럼프는 ‘야만적인 독재자’라고 그를 평했다. 그러면서도 ‘자유를 향한 쿠바인들의 여행’을 돕겠다고 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달변가 카스트로의 '말말말'

김윤정 기자 뉴스1 2016.11.27 15:43
1999년 쿠바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수도 아바나에서 연설하고 있다. © AFP=뉴스1

25일(현지시간) 타계한 쿠바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연설 능력에선 누구나 인정하는 달변가였다. 그가 남긴 전설적 어록은 책으로도 출간됐을 만큼 사랑을 받고 있다.


◇ 역사가 나를 무죄로 선고할 것이다.

1953년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실패로 끝난 작전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자기 변론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선고할 것"이라고 말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혁명가 카스트로의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반미 운동을 벌일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운명.

쿠바 혁명1년 전인 1958년, 카스트로는 그의 혁명동지이자 첫번째 부인인 셀리아 산체스에 보낸 편지에서 "전쟁이 끝나면 더 길고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며 "나는 반미 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것이 나의 진정한 운명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반미 운동은 혁명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 조국이 아니라면 죽음을!

1960년 쿠바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한 라 쿠브르 호 희생자 추모식에서 그는 미국의 폭력 행위를 규탄하며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이 어록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몇년 뒤 냉전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땐 "사회주의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변주되기도 했다.


◇ 혁명은 영원할 것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기로 한 것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극한으로 치달았을 당시에도 카스트로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제국주의자들은 평화를 빌미로 우리에게 혁명을 멈출 것을 요구한다"며 "우리는 혁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깃발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 나는 권력의 노예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가였던 카스트로도 권력의 단맛을 본 후엔 그 자리에서 쉽게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91년 "나는 절대로 정계에서, 혁명전선에서, 사상에서 은퇴하지 않을 것"이라며 "권력은 종속이이고, 나는 그것에 종속됐다(Power is slavery, and I am its slave)"고 말했다.


카스트로는 집권 49년만인 지난 2006년 건강상의 이유로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그는 그 후에도 언론을 통해 연설하고, 정책에 관여하는 등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카스트로 전 의장도 지난 4월 마지막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는 작별인사를 한 듯 보였다. 그는 "곧,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나도 마감할 것이다"며 "모든 이에게 차례는 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