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송희영 칼럼] 배부른 不況

바람아님 2014. 12. 13. 10:54

(출처-조선일보 2014.12.13 송희영 주필)

低성장 맞춰 지출 안 줄이고 경기 부양 핑계 國債 남발한
일본 비웃으며 그 뒤를 좇아 정부 경제적 병폐 방치하고
기업 투자 않고 손실만 줄여… 이런데서 기적 바랄 수 있나

송희영 주필경제학자들이 모이면 화제가 모이곤 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이상향(理想鄕) 같다." 
대주주가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긴 곳, 경영인은 사상 처음으로 육상에서 초대형 선박을 조립하는
신기술을 개발한 곳, 종업원들은 자가용 타고 넉넉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한국산 첫 글로벌 기업' 칭송이 이어졌다. 5~6년 전 현대중공업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현대중공업 무파업이 10년을 넘길 무렵이었다. 
"이제 지들도 파업을 할 수 없게 됐어요. 파업하면 공장 근처 식당, 노래방, 당구장, PC방이 
다 영업 중단되잖아요. 그 가게들 대부분 자기네 소유거든요. 
회사가 잘돼야 배당 늘고 임금 올라가고 자기네 가게 영업도 잘되잖아요." 
종업원의 이익, 회사의 이익, 대주주의 이익은 그렇게 일치했다.

오늘 울산의 그곳에는 '내가 흘린 땀의 대가 투쟁으로 쟁취하자'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무파업 19년 기록은 깨졌다. 주주·회사·종업원 3자 간 이익 공동체도 금이 갔다.

등이 따뜻하면 눈앞에 닥친 독(毒)화살을 몰라보는 게 인간인가. 
고속 성장의 성공 스토리에 푹 젖은 탓인가. 
적자 장부는 잠을 설친 밤의 꿈처럼 눈을 뜨면 증발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회사가 올해 3조원 적자(赤字)일 것이라는 경고는 들리지 않는 듯하다.

일본이 20년 장기 침체에 빠져 들어갈 때였다. 집에는 냉장고, 에어컨, 자가용이 두루 갖춰졌다. 
쇠고기 덮밥 가격은 600엔에서 300엔으로 떨어졌다. 
먹고 입고 즐길 게 넘쳤다. 나라 경제는 성장이 멈췄지만 모두 배가 불렀다. 
'풍요로운 불경기'라거나 '넉넉한 디플레(디플레이션)'라고 했다.

성장이 멈칫하자 임금 상승이 멈췄다. 
종신 고용은 산산조각 났고 임금피크제 계약서에 사인하고서야 정년을 보장받았다. 
원룸 월세와 덮밥 값이 떨어졌다고 뿌듯해하는 순간 거래 은행 간판은 낯선 이름으로 바뀌었다. 
20년이 되지 않아 일본의 경제력은 중국에 밀렸다. 
저성장·저물가에 적응하는 일이 그토록 힘든 고역(苦役)이라는 것을 좀체 알지 못했다.

한국 경제는 벌써 장기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다. 2011년 이래 4년째 3% 성장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한 해를 빼고 2008년부터 꼽으면 7년째다. 
연봉 인상보다는 동결, 삭감에 익숙해질 만한 때도 됐다. 
다이어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입이 늘지 않아 저녁 술자리를 줄일 수밖에 없다. 
구내식당에서 2000원짜리 점심을 먹은 뒤 4500원짜리 라테로 입가심하는 습관도 고쳐야 할 시기를 맞았다.

그러나 지금 안방까지 밀어닥친 물결을 부인하는 것은 현대중공업 노조만은 아니다. 
정치권부터 앞장서서 공짜 복지 정책을 살포하지 않았던가. 
세금 수입이 늘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낳은 불량품이다. 
저성장은 세수(稅收) 감소와 같은 말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수입에 맞춰 씀씀이를 고치지 않고 빚을 내서라도 자기 소비벽(癖)에 맞춰 지출을 늘린다.

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에는 해마다 1월이면 전 세계 고위급 인사들이 모인다. 일본 총리도 단골이다. 
주최자인 클라우스 슈바브 세계경제포럼 회장이 일본 총리를 소개할 때면 "내년에도 꼭 오시라"고 덧붙였다. 
그때마다 청중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20년 사이 총리가 15명 바뀌다 보니 다보스포럼에 두 번 연속 참가한 총리는 없었다.

15명의 일본 총리가 그랬다. 
저성장에 맞춰 정부 씀씀이를 바꾸지 않고 국채(國債)를 찍어내 빚으로 자기들 지출 습관을 충족했다. 
국회의원들은 너도나도 지역구에 도로·댐·공항을 세웠다. 
명분은 언제나 '경기 부양을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는 그런 일본을 비웃으며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기업들은 공격적 투자를 피한다. 
신규 사업에 수천억원을 투자하기보다는 정권이 부탁하는 창조경제센터 사무소를 출범하는 데 수십억원을 쓴다.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이 남는 장사라는 방어적 처신이다. 
관료들 행동 매뉴얼에도 '안전 운행'이 가장 윗줄에 쓰여 있다. 
정권 교체로 언제 권력의 칼을 맞을지 모르니 우리 경제의 썩은 부위(部位)를 도려내는 수술에 앞장서지 않는다.

여기서 기적을 바랄 수는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6번째 대통령을 뽑았지만 누구도 경제의 구조적 병폐를 고치지 않았다. 
노동시장에는 정규직들 등쌀에 카트 아줌마나 대리 운전만 늘고 있다. 
좀비 기업들은 국민 세금과 은행 빚으로 생명을 억지 연장하며 벤처기업이 탄생할 땅까지 점령해버렸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지도자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이제 그의 후손을 보며 맥 빠진 표정들이다. 
잦은 인사 실패, 권력 내부의 핵분열만 보고 그러는 것은 아닌 성싶다. 
대통령이 '권력의 진돗개들' 싸움에 휘둘려 불황 탈출에 관심이나 있겠느냐고들 한다. 
정권 출범 때 성장 목표조차 내놓지 않았던 이유도 알 만하다고도 한다. 
새해 들면 '아버지에게 신세 진 것 갚는 심정으로 지지한다'던 부채(負債) 의식에서 해방됐다는 분들이 부쩍 늘어날 듯하다. 
그렇게 불황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