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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망언에 분노하는 사이 / 이명원

바람아님 2015. 4. 7. 10:05
한겨레 2015-4-6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어떤 진화의 경로를 거쳐 인간이 사물과 기호를 연결하고, 분절음을 체계적으로 발음하고, 통사론적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미스터리다.

일단 인간이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점에 주목해 본다면, '말'과 '문자'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매우 근원적인 특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여명기까지 '말'과 '문자'는 계급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누구나 말할 수 있었지만 모두가 문해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문자를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계급은 권력을 독점했다. 그들은 권력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문자'의 대중적 학습과 유포를 제한했다. 문자로 상징되는 표상권력과 이에 동반한 현실 권력을 획득할 수 없었던 대중들은 '말'과 '이야기'를 통해 권력에 상징적으로 대항했다. 구비 민담은 물론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자주 발견하게 되는 유머, 풍자, 위트 등과 같은 재담의 활용을 통해, 힘없고 이름없는 대중들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층의 위선과 폭력을 고발해왔다.

물론 21세기 한국에 '문맹'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적 상황만 보면, 권력자와 대중 사이의 문해능력을 둘러싼 격차는 전혀 없다. 그러나 소통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보면, 권력자들은 전파력 강한 대중매체의 언로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고 대중들은 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른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 대중들은 집단적 민의를 표출하곤 하지만, 힘 있는 공식 미디어들은 대중의 비판들을 '괴담'으로 격하시키는, 사실상의 여론조작과 왜곡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권력자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망언'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관료와 정치가들의 망언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 지탄받을 것이 분명한 망언이 권력 내부에서 저렇게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망언을 통한 존재감의 과시다. 대중 미디어는 사실보도라는 명분으로 망언의 확대재생산에 일조한다. 그럴 때 망언의 진위보다 발설자가 집중적으로 초점화된다. '정치라는 극장'에서 소도구에 머물러야 할 존재가 주역인 것처럼 끝없이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여론의 시선 집중에 따른 권력의 실체화 현상이 나타난다.

둘째, 망언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 역시 문제다. 대체로 정치인과 관료들이 도발하는 망언들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집단을 은유적으로 타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종북 딱지'가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예상되는 망언의 법적 책임은 회피된다. 불행하게도 망언의 강도가 높을수록 지지층의 선동적 결집이 가시화된다는 점 또한 반복되는 망언의 존재 근거다.

셋째, 반면 망언의 대상으로 호명된 사람들은 의지와 무관하게 자기 존재 증명을 반복하는 악무한적 궁지에 빠지곤 한다. 망언이 촉발하는 '낙인효과'를 적극적으로 분쇄하려 하면 할수록 망언의 프레임은 더욱 견고해지는 역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망언에는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망언 당사자를 선거 등을 통해 제도적으로 응징함으로써 정치적 책임을 끝까지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망언에 분노하는 사이, 배후에서 일어나는 더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을 간과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이 망언이 도발한 여론의 복마전 속에서 후경화되어 날치기되는 사례가 자주 있다.

정치가들의 망언은 많은 경우 성동격서의 전략이다. 참으로 중대한 정치적 의제는 은폐하면서, 주변적 의제로 여론을 호도하는 책략으로 망언처럼 효과적인 주술적 수사학은 없다. 그런 명백한 정신분산 장치가 망언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