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4.23 이한우 문화부장)
- 이한우 문화부장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현대사회를 '위험 사회'로 명명한 것이 이미 30년 전인 1986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는 민주화라는 대명제 때문에 이 말에 크게 공감하지 않았고
오직 민주냐 반민주냐라는,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기까지 한 이분법이 말 그대로 휩쓸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의 성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위험 사회란 말이
한동안 유행어가 됐다.
그 후 국내외 학자들의 명명(命名)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감시 사회' '과로 사회' '모멸감 사회' '낭비 사회' 등 책으로 출간된 것만 20여 가지에 이른다.
그중에서 어느 정도 주목을 끌었던 개념은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 사회'(2013년)와
미국 사회학자 스테판 메스트로비치의 '탈감정 사회'(2014)였다.
이것들은 한국 사회가 가진 병폐를 크게든 작게든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었지만
2015년 4월의 한국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래서 굳이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공분(公憤) 증발 사회'로서의 한국이다.
이미 우리 주변은 공분해야 할 사건과 사고들로 가득하다.
당장 세월호 문제에다 성완종 사건까지 겹치며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이는 누가 봐도 분명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언제부턴지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일이 터지면 묘한 냉소가 함께 퍼져간다.
선뜻 공분하며 따라가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광우병 사태와 촛불의 후유증이 가장 결정적이다.
그 대부분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지만 그에 대한 진실한 고백은 아직까지도 없다.
그 후 여간해서 사람들은 공분을 품거나 표시하지 않는다.
특정 사건의 정쟁화 혹은 변형된 대선 불복 운동이라는 공식을 많은 사람이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 1년도 돌이켜보면 공분이 어떻게 정쟁화되고 그 결과 처음에 들끓었던 공분이 어떻게 증발해버렸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비극적 사고가 있었고 많은 이는 분노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순간 사고의 재발을 막고 좀 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감으로써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쪽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지금도 대통령만 탓하고 '진실' 운운하며 사고의 실체적 진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채 무리한 요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때론 폭력적이다. 이건 적어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는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 함께 공분을 품었던 사람도 점점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족을 잃은 슬픔에는 끝이 없다. 그렇기에 유족들의 애통한 마음을 다 보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면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공자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애이불상(哀而不傷)'. 슬퍼하되 몸이 상하는 지경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 진실과 위선의 경계가 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자신의 몸만 상하는 게 아니라 온 사회가 피멍이 들 정도로 다툼이 격화되고 있다.
끊임없이 남 탓을 한다. 누구도 내 안의 부조리와 욕망을 반성하려 들지 않는다.
이렇게 가다가는 제2, 제3의 세월호가 또 찾아올 수 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앞으로 공분이 증발해버린 공동체에서 그냥저냥 요행에 자신을 내맡긴 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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