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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조선, 당하기만 한 문약한 나라는 아니다

바람아님 2015. 6. 27. 09:03

동아일보 2015-06-27

 

◇조선의 대외 정벌/임홍빈 유재성 서인한 지음/464쪽·1만9800원·알마


왜구의 침략을 그린 16세기 명나라 그림.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 해안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고, 조선은 급기야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알마 제공

 

1604년 4월 두만강변 여진족 ‘노토 부락(老土 部落)’. 새벽녘 어스름 속에서 적군 병사 3000명이 출몰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놀란 여진족 병사들은 서둘러 무기를 챙겨 산꼭대기로 달아났다. 군대가 자취를 감춘 부락은 이미 무주공산. 토벌군은 가옥 1000여 채를 불사르고 땅속에 묻어둔 저장 식량을 파내 태웠다. 이어 밭에 뿌린 곡식 종자마저 찾아내 일일이 짓밟았다. 생계수단을 아예 뿌리 뽑는 강경한 조치였다. 이로써 경작지 면적이 40여 리에 달해 여진족 부락 중 가장 번성했던 이곳은 하루 만에 황무지가 됐다.

자, 여기 등장하는 적군은 누굴까. 역사에 해박한 독자가 아니라면 인근의 다른 경쟁 부족이나 명나라 관군을 떠올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철저한 토벌을 감행한 주체는 조선 관군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세에 당하기만 한 문약(文弱)한 이미지의 바로 그 조선이다. 임진왜란 이후 북방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 여진족이 끊임없이 약탈을 자행하자 본거지 소탕에 나선 것이다.

이 책은 대마도나 여진족 토벌처럼 조선왕조 500년에서 극히 드물었던 해외 정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독특한 내용에 걸맞게 저자들은 모두 국방부에서 근무한 군사(軍史) 편찬 전문가들이다. 그래선지 해외 정벌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이고 군대의 움직임과 전법 등이 폭넓게 다뤄져 흥미롭게 읽힌다.

이 책에서 다루는 조선시대 해외 정벌은 대마도 왜구 정벌, 여진족 토벌, 나선(러시아) 정벌이다. 방어전을 기본으로 했던 조선의 군사정책상 국외에서 군사작전은 이 세 가지가 거의 전부였다.

조선은 고려 말부터 준동한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여진족을 토벌하고 그 유명한 4군 6진을 개척해 영토로 편입시켰다. 관직과 곡식으로 회유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지만 여진족의 약탈이 극심해지면 근거지에 대한 토벌 작전에 나서는 식이었다. 문제는 부족 단위로 산발적으로 공격하는 여진족의 게릴라전 패턴 때문에 한 번의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이들을 무력화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강조한 대외 정벌이 결국 절반의 성공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지적한다.

조선 위정자들의 어처구니없는 현실 인식이 결정적인 한계로 작용했다.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젖어 여진족과 왜구를 오랑캐라며 깔보고 제대로 대처하지 않다가 온갖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예컨대 1419년 5월 13일 왜구가 불과 8일 만에 장소를 옮겨 황해도 해주 연평곶이를 공격했지만 방비에 소홀했던 조선 수군은 이내 포위를 당하고 만다. 조전절제사 이사검은 왜구에 아전을 딸려 보내 쌀 5섬과 술 10단지를 주고 퇴각할 것을 읍소했다. 정규군이 아닌 도적 떼에 불과했던 왜구에게 한 나라의 정규군이 뇌물을 바친 셈이다.

가장 압권은 승냥이 떼 운운하며 경멸한 여진족의 청나라에 패해 1637년 인조가 ‘3배 9고두례’의 노예 의식을 치른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한 번 절을 올릴 때마다 머리를 세 번씩 땅바닥에 부딪치는 이 의식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됐다.

김상운 기자

  [서울신문]
삼국시대 이래 2000여년의 한국사에서 900~1000번 이상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가운데 ‘대외 출병’ 횟수는 얼마나 될까. 삼국시대 이외에는 그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데 드물긴 해도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원정’에 해당하는 군사작전이 있었고, 그 역사적 의미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책은 그간 중요도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조선의 대외 정벌에 대해 살피고 있다. 필자 셋이 3부로 주제를 나눠 조선 대외 정벌의 실체를 재구성하고, 재평가했다.

1부 ‘대마도 정벌’은 세종 때의 왜구 토벌작전을 담고 있다. 조선의 기본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이었고, 이는 왜구에도 해당됐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어도 조선의 회유정책은 변함없이 유지됐다. 한데 세종 초기에 이르러 갑자기 강경노선으로 돌아섰고 대마도 정벌까지 단행했다. 1부에선 이 같은 공세적 대처가 지니는 군사적 의의, 두 차례에 걸친 왜란과 병탄 그리고 최근 일본의 군국주의화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살피고, 이에 담긴 역사적 함의를 짚어 본다.

2부 ‘보주 강 야인토벌’ 역시 세종 대에 이루어졌다. 야인, 즉 여진족은 숙신, 말갈 등으로 불리던 중국 동북지역의 민족이다. 개국 초기 조선의 북방은 세종의 개탄처럼 ‘야인들의 사냥터’였다. 여진족의 침탈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세종은 과감히 이들을 토벌하고 사군과 육진을 개척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여진족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 불씨를 남겼고, 이후 두 차례 호란으로 청과 군신지맹을 맺는 치욕을 겪게 된다. 이는 훗날 조선의 쇠망과 일제식민지화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3부 ‘나선정벌’은 이전 두 차례의 대외 원정과 성격이 다르다. 우선 ‘나선’(러시아)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파병도 조선의 의지가 아니라 청의 강요로 이뤄졌다. 17세기 중반, 동진정책을 펼치던 제정러시아와 청나라는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군신 관계에 있던 조선으로서는 번번히 패하던 청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고 실제 청의 승리에 일조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소중화’ 의식, ‘친명배금’ 정책 등에 매달려 갑론을박하고 있었지만, 냉혹한 국제관계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힘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것을 나선정벌은 여실히 보여 줬다. 저자들은 특히 효종의 ‘북벌’이란 이상이 현실의 벽에 부닥쳐 좌절한 것은 우리가 여러 각도에서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손원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