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15-6-30
안타까운 사연의 전말은 이랬다. 동물을 무척 좋아하는 일흔이 다 된 한 남자가 옆집에 산다. 왕년에 ‘해변으로 가요’란 곡으로 히트를 쳤던 ‘키보이스’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사람이다. 그 집 바로 옆은 수녀원. 수녀원에도 개가 한 마리 있다.
얼마 전 집 앞에서 삐쩍 마른 개를 힘겹게 산책시키고 있는 수녀님과 마주친 그 남자. 두 살쯤 됐을까. 시각장애인 안내견종인 번쩍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다. 갈비뼈까지 만져지는 가죽만 남은 몸에다 제대로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다리. 수녀님도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얼핏 보기에도 매우 심각해 보여 그 길로 양수리 가축병원에 데려갔다. 심장사상충이라는 병에 걸렸단다. 병이 이미 많이 진행돼 나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일단 치료는 시작하기로 했다.
하루 두 번씩 한 달 넘게 정성스레 약 먹이고 산책시킨 결과 처음 봤을 때 13㎏이었던 개가 한 달이 넘은 지금은 20㎏이나 된다. 며칠 전부터는 아예 약 먹을 시간에 맞춰 번쩍이가 집 앞까지 와서 저렇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멀찌감치 숨어서 기다리는 이유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근처에 지나가기만 하면 미친 듯이 짖어대는 우리 집 진돗개 ‘멍석이랑 멍순이’ 때문일 게다.
동물을 좋아하는 그 사람 못지않게 동물들도 엄청 그를 좋아한다. 바다의 왕자가 마린보이라면 숲 속의 왕자는 키보이(스)라 할까나. 동물과의 대화도 가능하다는 그 사람. 가만히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말을 하면 그 뜻이 동물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나. 사랑을 받고도 사람은 배신하지만 동물은 한번 받은 사랑을 절대로 잊지 않고 배신도 않는다는데. 그나저나 걱정이다. 가끔씩 바쁜 그를 대신해 번쩍이를 돌봐준 덕에 수녀님에게 보리수 열매도 얻어먹고 버찌 잼도 얻어먹었지만 아직 병이 다 나은 게 아니다.
이제까지는 치료를 위한 몸 회복 단계였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치료를 할 거다. 항암치료 수준의 위험한 주사라서 쇼크의 위험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양수리 그 의사가 실력도, 신뢰도 좀 있어 보여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벌써 또 약 먹일 시간인가. 때맞춰 수녀원에서 문을 열어 놓았는지 실개천 건너 뽕나무 아래 얌전하게 앉아 그를 기다리는 번쩍이의 모습이 보인다. 맑은 눈을 가진 우리 번쩍이가 꿋꿋하게 치료를 잘 이겨내고 말처럼 뛰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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