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建國 대통령 제대로 평가해야 우리 現代史가 바로 선다

바람아님 2015. 7. 22. 10:57
조선일보 2015-7-20

어제 19일은 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서거한 지 꼭 50년 되는 날이었다. 4·19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나 미국 하와이로 쫓기듯 간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현지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떴다. 그는 "조국 땅 다시 밟고 죽는 게 소원"이라며 이발비 5달러도 아껴가며 귀국 여비(旅費)를 모았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유해로 돌아왔다.

이승만 50주기(周忌) 추모식은 17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렸다. 본래는 제날짜에 해야 했으나 일요일이라 추모객이 덜 올까 봐 이틀 앞당겨 치렀다고 한다. 추모식 주관도 국가보훈처 등 정부 기관이 아니라 민간단체인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했다. 해마다 이승만 추모 행사가 그랬듯 야당 대표는 오지 않았고 야권 인사들도 보기 힘들었다. 올해는 이승만 서거 50주년이자 그의 탄생 1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정도 상징적인 해라면 그를 기리는 학술회의와 같은 부대행사가 있을 만도 하지만 그런 것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공영 방송 KBS가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 타진'이라는 엉뚱한 보도로 건국 대통령을 깎아내리려 한 것만 눈에 띄었다.


이승만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이끌었다.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 새 나라를 세우는 동시에 국민의 자유와 인권·평등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초석을 쌓는 '이중(二重) 혁명'의 한가운데 이승만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한 140여 나라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에 동시에 성공해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6·25 전란의 비극에서 나라를 지켰으며, 한·미 동맹의 혜안으로 안보를 반석에 올려놓은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

터키는 해마다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이면 거리에 사이렌이 울리고 길 가던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춘다고 한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터키보다 더 성공한 우리에겐 건국절도 없고 건국 기념공원도, 건국 기념관도 없다. 건국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관을 짓거나 그에 대한 전집(全集) 하나 내려 해도 국회 예산 심의에서 잘리는 나라다.

이승만은 12년간 무리한 집권을 하며 독재를 비롯해 적지 않은 실정(失政)을 저질렀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겐 공(功)과 과(過)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역사적 인물을 자리매김할 때는 공·과를 공정하고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 중국의 마오쩌둥이 수많은 악행으로 수천만 국민을 죽였으나 그에게 피해를 당한 덩샤오핑은 "공(功)이 더 크다"고 국부로 추앙케 했다.


우리 사회에서 집요하게 이승만을 깎아내리는 세력의 목적은 결국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의 역사에 흠집을 내려는 것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공격이다. 이 거짓 선동으로부터 우리 자랑스러운 현대사를 지키는 일은 먼저 건국 대통령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0주기 추모식 "역사의 도약 이끈 지도자…국부로 추앙받아야"

한국경제 2015-07-17 

국립현충원에 700여명 추모객

"신분제 철폐·자유민주주의 수호
경제대통령 면모 재평가 필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17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제50주기 추모식’에서 이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가 부인과 분향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17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제50주기 추모식’에서 이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가 부인과 분향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나는 이승만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중략) 우리가 독립을 위해 건국을 준비하여야 하며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에 영원할 것이오. 분투하라.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17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건국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 제50주기 추모식’에서 700여명의 추모객은 70여년 전 녹음된 단파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일본이 패망하고 있으며 동포들이 함께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1942년 6월13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미국의소리(VOA)’ 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입소문을 타고 일제 치하의 사람들에게 퍼져 해외에서도 누군가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날 행사는 50년 전인 1965년 7월19일 하와이의 노인 요양원에서 아흔을 일기로 서거한 이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치러졌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했다. 정의화 국회의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원식·이홍구 전 국무총리, 박승춘 보훈처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추모기도를 한 송기성 정동제일교회 목사는 이 전 대통령이 서거 전 조석으로 드렸다는 기도 문구를 소개했다.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렸습니다. (중략) 우리 민족이 굳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3월부터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진 전 의원은 기념사에서 “이 전 대통령은 토지개혁을 통해 가난한 농민에게 경제적 자립 기회를 줬으며 봉건적 신분제를 없앴다”며 “경제발전의 뿌리를 심은 경제대통령, 인재를 길러낸 교육대통령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의 실패를 정확히 예견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였다”고 추모했다.

정의화 의장은 추모사에서 “(이 전 대통령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 문화 융성의 토대를 마련해 주신 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 발전의 토대를 닦은 이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산업화 시작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며 “극동 약소국이자 최빈국이 13위 경제강국, 아시아 모범 민주국가, 지구촌으로 뻗어가는 문화국가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무성 대표는 “그동안 우리 후손은 이 전 대통령의 흠결을 파헤치는 데 골몰했을 뿐 국가는 존재해도 국부(國父)는 없이 살아왔다”며 “망국과 식민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것은 역사의 도약이었다. 이제 70년 한국 근대사에서 국부의 자리로 안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는 유족 대표 인사에서 “이 박사는 돌아가시기 전 저를 보시면서 ‘굳게 서서 자유를 지키라’며 ‘단결해서 통일하도록 우리 국민에게 바라고 소원한다’는 말씀을 하셨다”며 “이와 같은 유언을 우리 모두가 새기면서 한국이 세계에 우뚝 선 자유민주 통일국가로서 발전하길 소원한다”고 했다.

김대훈 기자

 

[이승만 서거 50주기] 建國대통령 서거 50주기인데… 예년과 다름없는 평범한 추모식

조선일보 : 2015.07.18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1942년 6월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전파를 탔던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이승만 육성 녹음본이 17일 오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 울려 퍼졌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특유의 떨리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 결기 서린 목소리로 고국 동포의 항일투쟁을 독려하는 대목이다.

이날 서울현충원에서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박진) 주관으로 '건국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 제5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서거 50년과 탄생 140년을 맞는 해라는 상징성과 달리, 추모식은 예년과 별 다름없었다. 비슷한 내용과 규모의 추모 행사와 묘소 참배가 전부였다. 기념 학술회의 같은 부대 행사는 없었다. 기념사업회 측은 "원래 기일은 19일인데,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추모객이 덜 올까 봐 행사를 앞당겼다"고 했다. 그 바람에 제67주년 제헌절과 겹쳤다.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제헌 국회의장이기도 하다.

이날 정·관계 인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그리고 시민 등 1000여명이 추모식장을 채웠다. 야권 인사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추모객도 대부분 장·노년층으로 젊은이가 드물었다.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기념사업회에서 이틀 전쯤 초청 팩스 한 장만 보내는 등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며 "과거에 야당 대표가 참석한 예도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기념사업회 측은 "우편으로 초청장을 보냈고, 이는 새누리당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추모사에서 "이 대통령에겐 한순간도 편안한 날이 없었을 것"이라며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고 했다. 이어 "빼앗긴 조국을 찾아야 했고, 전쟁을 이겨내야 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했는데 그 불면의 밤이 얼마나 깊었겠느냐"며 "우리에게 이 박사처럼 용기 있고 지혜로운 큰 지도자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 전쟁 극복, 산업화의 시작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추모사에서 "건국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의 출발"이라며 "이제 국부(國父)를 국부의 자리로 앉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은 새로운 비전과 빛나는 예지, 지혜로운 정치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갖춘 예외적 리더십을 필요로 했다"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능케 한 모든 얼개는 이승만 대통령의 손으로 놓았다"고 했다. 이어 "그동안 우리 후손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흠결을 파헤치고 드러내는 데만 골몰했을 뿐 그의 역사적 공로를 인정하는 데는 인색했다"며 "칠흑 같은 건국의 길에서 때로 비틀거리지 않고 때로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행사 도중 간간이 눈물을 닦기도 했다.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장인 박진 전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무엇보다 큰 업적은 공산주의의 실패를 정확히 예견한 것"이라며 "그가 살아생전 꿈꾸던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대한민국은 비로소 완전한 건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84)씨는 "돌아가시기 전에 저를 보시면서 '굳세게 서서 자유를 지켜라'는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을 전하신 뒤 '일치단결해서 어서 남북을 통일하도록 우리 국민에게 바라고 소원한다'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전했다. 그는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아버님의 손을 잡아드리면서 '아버지 소원대로 남북 통일을 우리 손으로 이루겠다'고 서약했다"며 "어서 반가운 남북의 자유 민주 통일이 이뤄지기를 여러분과 함께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인수씨는 부인과 함께 추모식 한 시간 전부터 나란히 입구에 서서 추모객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맞이했다. 추모사에서도 10분 인사말의 절반을 할애해 수십 명 참석자의 이름과 직책을 밝혔다. 이날 참석자들은 추모식을 마친 뒤 함께 이승만 대통령 묘소로 가서 분향하고 묵념했다.



이승만 서거 50주년

사저 ‘이화장’까지 양도... 건국 대통령의 곤궁한 末年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이 하야 후 하와이에서 거주할 당시 숙소와 생활비를 제공해 준 한 교민에게 사저인 서울 이화장의 소유권을 양도한 ‘위임장(Power of Attorney)’이 처음 공개됐다.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하야한 직후인 1960년 5월 29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하와이로 떠나 1965년 7월 19일 서거할 때까지 5년 2개월간 머물렀다.

조선일보 : 2015.07.19 


이화장 양도 위임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가 1962년 9월 11일자로 작성해 교민 윌버트 최(Wilbert Choi·1914~1970)에게 준 것으로 하와이에서 47년째 살고 있는 이승만 연구자 이덕희(74)씨가 최근 입수해 공개했다. 이씨는 이 위임장을 이승만 서거 50주기(19일)에 맞춰 출간하는 책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에 싣는다. 
하와이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이승만이 하야한 후 하와이에서 생활할 때 숙소와 생활비 등을 제공했다. 이승만은 당초 2~3주 머물 생각으로 하와이로 떠났으나 정부의 귀국 불허 방침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위임장’은 타자기 인쇄체 영문으로 작성된 2장짜리 문서다. 문서는 ‘이전에 대한민국에서 살았고 현재 하와이 호놀룰루 마키키 2033번지에 거주하는 이승만(Syngman Rhee)과 프란체스카 리(Francesca Rhee) 부부는 한국 서울 이화동 1번지 면적 1946평(6433㎡) 이화장의 토지와 시설물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플로라 최의 남편인 윌버트 최에게 양도한다’고 되어 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위임장 둘째 쪽에 각각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 아래에는 공증인(notary public)의 서명이 있다. 이승만 내외가 거주했던 마키키 2033번지 주택은 윌버트 최가 소유한 건물이었다. 윌버트 최는 이화장 양도 위임장을 받았으나 이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1970년 8월 사망했다.

위임장은 이씨가 2008년 저술 각주에서 언급해 학계에 알려졌으나 원본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생활비의 대가로 이화장을 넘길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라며 “하야 후 거액의 외화를 유출해 호화 생활을 했다는 식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낭설임을 증명하는 문서”라고 말했다. 위임장은 현재 윌버트 최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15일(현지 시각) “아버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애국심에서 이승만 박사를 모셨다”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위임장을 발견했지만 권리를 주장할 생각을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윌버트 최에게 이화장 소유권을 넘긴다는 위임장을 써준 때는 1962년 9월 11일. 하야 후 하와이에 온 지 2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하와이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1960년 5월 29일 서울을 떠날 때는 그저 2~3주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부인 프란체스카(1900~1992) 여사가 “쉬고 오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짐이라곤 옷가지가 든 트렁크 2개, 평소 쓰던 타자기와 약품 등을 넣은 가방 2개가 전부였다. 여러 차례 돌아가려 했지만 한국 정부가 귀국을 막았다.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생활비를 대주는 윌버트 최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버지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승만 박사를 도왔습니다. 위임장 얘기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들은 적이 없어요.” 윌버트 최의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15일(현지 시각) 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목조 주택 앞에서 “이곳이 이 박사 내외가 살던 집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한두 번 온 적이 있다”며 회상에 젖었다. 호놀룰루 공항에서 H1 도로를 타고 남동쪽 시내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다. 한적한 주택가 언덕에 있는 집은 한쪽에서 보면 단층, 다른 쪽에서 보면 2층 집이다. 양자 이인수(84)씨는 “1961년 12월 13일 마키키 집에서 처음 아버님을 뵈었다. 반(半)지하 1층에 내가 살았고, 아버님과 어머니(프란체스카 여사)가 2층에 계셨다”고 회고했다.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조경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와이 부호들의 저택, 호놀룰루 공항 광장, 주요 공원의 정원 설계가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올 수 있도록 항공편도 마련했다. 1960년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밤이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이승만이었다. 하와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윌버트 최는 미국 민간 항공사 팬암(Pan Am) 하와이 지점장인 어니스트 올브라이트(Ernest Albright)에게 연락해 괌에 있는 CAT항공 DC-4 여객기를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등 교민들과 함께 비용을 마련했다. 하와이 거주 이승만 연구자 이덕희(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씨는 “당시 전세기 비용은 2만7000~3만4000달러 정도였다”고 했다.

이승만 내외는 당초 오아후섬 동북부 카할루 지역 미오미오 루프 47-259번지 윌버트 최의 바닷가 별장에 머물렀다. 16일 찾아간 집은 지금도 50여년 전 모습과 같았다. 정문에서 벨을 눌렀다. 한 미국인 남성이 문을 열었다. “플로리다에서 왔다”는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하고 며칠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객 상대 임대 주택이 된 셈이다. 양해를 구하고 집에 들어서니 미국 방향 태평양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승만은 이 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외신은 “이승만 박사는 기자들의 방문을 사절하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전했다.

마키키 주택으로 옮긴 때는 여섯 달 후인 1960년 12월이었다. 바닷가 별장은 시내에서 너무 멀었다. 직접 자동차로 달려보니 약 40분거리. H1과 리케리케 고속도로를 지나 병풍처럼 생긴 높은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다. 매주 시내에 있는 교회(한인기독교회)에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하와이 체류가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마당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집 부엌에서 10쯤 떨어진 방까지 10차례 왕복 운동을 하는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생전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하와이 교민 단체인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87) 회장은 “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과자 몇 개를 내주셨다. 모두 싼 것들이었다. 부부의 살림이 무척 곤궁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5달러 이발비도 아꼈다.

이승만은 늘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라며 눈시울을 붉힌 때도 있었다.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도 했다. 귀국 기회도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세.” 전날 교민들과 작별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출발 당일 오전 9시 30분 정부 훈령을 받은 김세원 하와이 총영사가 마키키 집에 와서 귀국 불허 방침을 전했다. 이승만은 조용히 듣더니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해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이승만은 귀국이 좌절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날 저녁 트리플러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29일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으로 옮긴다. 마우나라니 병원 측은 이승만을 무료로 모시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 병원은 그때 모습 그대로 있다.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40도 경사는 될 듯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한국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이승만은 이곳 202호실에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한국 시각 오후 7시 35분)이었다. 병실에서 창밖을 보니 한국 방향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생전 바다를 가리키며 “저쪽이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韓人)들이 사는 데야”라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이승만 서거 50주기] (1) 下野 후 하와이에서 보낸 마지막 5년 2개월

"한국땅 밟고 죽는게 소원"… 歸國 여비 모으려 5달러 이발비도 아껴

조선일보 : 2015.07.18 이한수 기자

 

이승만이 윌버트 최에게 이화장 소유권을 넘긴다는 위임장을 써준 때는 1962년 9월 11일. 하야 후 하와이에 온 지 2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하와이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1960년 5월 29일 서울을 떠날 때는 그저 2~3주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부인 프란체스카(1900~1992) 여사가 "쉬고 오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짐이라곤 옷가지가 든 트렁크 2개, 평소 쓰던 타자기와 약품 등을 넣은 가방 2개가 전부였다. 여러 차례 돌아가려 했지만 한국 정부가 귀국을 막았다.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생활비를 대주는 윌버트 최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버지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승만 박사를 도왔습니다. 위임장 얘기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들은 적이 없어요." 윌버트 최의 아들 세드릭 최(67)씨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목조 주택 앞에서 "이곳이 이 박사 내외가 살던 집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한두 번 온 적이 있다"며 회상에 젖었다. 호놀룰루공항에서 H1 도로를 타고 남동쪽 시내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다. 한적한 주택가 언덕에 있는 집은 한쪽에서 보면 단층, 다른 쪽에서 보면 2층 집이다.

이민 2세인 윌버트 최는 조경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올 수 있도록 항공편도 마련했다. 1960년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밤이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이승만이었다. 하와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윌버트 최는 미국 민간 항공사 팬암(Pan Am) 하와이 지점장인 어니스트 올브라이트(Ernest Albright)에게 연락해 괌에 있는 CAT항공 DC-4 여객기를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등 교민들과 함께 비용을 마련했다.

이승만 내외는 당초 오아후섬 동북부 카할루 지역 미오미오 루프 47-259번지 윌버트 최의 바닷가 별장에 머물렀다. 16일 찾아간 집은 지금도 50여년 전 모습과 같았다. 정문에서 벨을 눌렀다. 한 미국인 남성이 문을 열었다. "플로리다에서 왔다"는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하고 며칠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여행객 상대 임대주택이 된 셈이다. 양해를 구하고 집에 들어서니 미국 방향 태평양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승만은 이 집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외신은 "이승만 박사는 기자들의 방문을 사절하고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전했다.

마키키 주택으로 옮긴 때는 여섯 달 후인 1960년 12월이었다. 바닷가 별장은 시내에서 너무 멀었다. 직접 자동차로 달려보니 약 40분 거리. H1과 리케리케 고속도로를 지나 병풍처럼 생긴 높은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다. 매주 시내에 있는 교회(한인기독교회)에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하와이 체류가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마당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집 부엌에서 10m쯤 떨어진 방까지 10차례 왕복운동을 하는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생전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하와이 교민 단체인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87) 회장은 "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과자 몇 개를 내주셨다. 모두 싼 것들이었다. 부부의 살림이 무척 곤궁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5달러 이발비도 아꼈다.

이승만은 늘 고국에 돌아가려고 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라며 눈시울을 붉힌 때도 있었다.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도 했다. 귀국 기회도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한국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우리 서울에서 만나세." 전날 교민들과 작별 인사도 나눴다. 그러나 출발 당일 오전 9시 30분 정부 훈령을 받은 김세원 하와이 총영사가 마키키 집에 와서 귀국 불허 방침을 전했다. 이승만은 조용히 듣더니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해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참아야지.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

이승만은 귀국이 좌절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날 저녁 트리플러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29일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으로 옮긴다. 마우나라니병원 측은 이승만을 무료로 모시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그때 모습 그대로 있다. 한국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이승만은 이곳 202호실에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한국 시각 오후 7시 35분)이었다. 병실에서 창밖을 보니 한국 방향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생전 바다를 가리키며 "저쪽이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韓人)들이 사는 데야"라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마지막을 보낸 하와이 병원에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숭모회 "서거장소 표지 만들 것"

조선일보 / 하와이=이한수 기자 / 입력 : 2015.07.20 

 

[이승만 서거 50주기] [2] 마지막 나날들

그는 병실서도 늘 祖國 생각… 소원 물으니 "한국 돌아갈 여비요!"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서거 때까지 3년4개월 지내
'50년 친구' 보스윅, 弔辭에서 "당신이 애국심 때문에 얼마나 고생… 잘 가시오"
5년2개월만에 돌아와 가족葬… 수십만 시민들 시청 몰려와 마지막 가는 '거인' 애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마지막 나날을 보낸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02호실의 현재 모습. /이한수 기자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02호실에 들어서자 작은 창문으로 태평양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마지막 나날을 보낸 곳이다. 이승만은 바다 건너 고국을 그리워하며 이곳에서 마지막 3년 4개월을 지냈다. 귀국이 좌절된 직후인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서거 때까지였다. 경사가 40도는 될 듯한 산길을 올라가야 했다. 마우나라니 하이츠 꼭대기에 있는 병원에 이틀간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입원 노인들이 운동하는 시간을 허락받아 16일(현지 시각) 오전 10시 병실에 들어갔다. 침대 셋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노인 세 사람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1950년 개원한 마우나라니병원은 이승만이 있던 50년 전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다.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다. 마우나라니는 '천국의 산'이라는 뜻. 하와이의 상징인 민둥산 다이아몬드 헤드와 와이키키 해변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내부 인테리어를 몇 차례 바꾸기는 했어도 건물은 그대로다. 이승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병원 어디에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 마지막 삶을 보낸 곳임을 알리는 표지는 없었다.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동균(70) 부회장은 "병원 측에서도 안내 표지를 세우는 데 호의적이지만 대신 기부를 원하고 있다"면서 "병원 측과 협의해 이곳이 이승만 대통령이 마지막 날을 보내고 서거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병원 측은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에게 병실을 무료로 혼자서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현재 병실 사용료는 연간 1인 10만달러(약 1억1400만원) 수준. 사이 챈터비 병원장은 "당시 병실료는 모르겠지만 지금 3인실인 202호를 3년 이상 사용한다면 100만달러 정도 든다"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병원 뒤편 직원용 숙소를 내줬다. 양아들 이인수씨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침부터 밤까지 병실에서 남편을 돌보다 이곳에서 잠을 잤다. 병원에서 '베스트 와이프(best wife)'라고 소문이 났다. 지금은 방의 벽을 터서 널찍한 공간이 됐다. 재활용 운동 기구가 놓여 있었다.
 
<figcaption>함께 戰場 누볐던 밴 플리트 前사령관의 작별인사 - 6·25전쟁 때 이승만과 함께 전장(戰場)을 누볐던 밴 플리트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존경하던 영웅을 향해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올리고 있다. /기파랑 제공</figcaption>
이승만은 병실에서도 늘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병원장 일레인 존슨이 물었다. "이 박사님, 소원이 뭐예요?" 이승만이 대답했다. "여비요!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요!" "아직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세요?" "그래요!"

이승만은 6월 20일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퀸스 병원으로 옮겨 응급 처치를 하고 닷새 만에 다시 마우나라니 병원으로 돌아왔다. 7월 4일 양자 이인수씨가 서거를 대비해 호놀룰루에 왔다. 7월 18일 많은 피를 쏟으면서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주치의는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침대 곁을 프란체스카와 이인수,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 세 사람이 지켰다. 호스를 입에 문 이승만은 잠시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이내 숨이 멎었다. "7월 19일 0시 35분, 임종하셨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인수씨에게 말했다. "얘야, 다른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말자꾸나."

영결식은 한인기독교회에서 열렸다. 이승만 자신이 1918년 세운 교회다. 1938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면서 광화문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광화문 모양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은 이승만 아니면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같은 모양으로 개축했다. 마우나라니 병원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1965년 7월 21일 오후 8시 30분 열린 영결식에는 현지인과 교민 700여명이 모였다. 하와이 주요 방송 매체도 이날 오후 애도 방송을 했다. 예배당 앞 중앙에 이승만이 누운 관이 놓였고 그 위에 태극기를 덮었다. 영결식 중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상반신 쪽 관 뚜껑 반을 열어 놓았다.
 
 
 <figcaption>하와이 요양병원에 입원한 李 前대통령 - 1964년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에 누워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기파랑 제공</figcaption>
 
<figcaption>시청 앞 광장 추모 인파 - 7월 27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영결식이 열렸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조선일보 DB</figcaption>
 이인수씨는 이승만의 '50년 친구' 윌리엄 보스윅(Borthwick)의 조사(弔辭)를 지금도 기억한다. 보스윅은 이승만의 관 앞으로 다가서더니 고인의 얼굴에 덮여 있는 베일을 걷어냈다. 그는 친구의 이마에 손을 대고 울먹이면서 절규했다. "내가 당신을 알아요, 내가 당신을 알아(I know you, I know you). 당신이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내가 잘 알아요. 친구여, 당신이 애국심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얼마나 비난받고 살아왔는지 내가 잘 알아요. 사랑하는 친구여, 잘 가시오…." 장의사였던 보스윅은 1920년 가을 상하이로 가는 배에 중국인 유해가 놓인 관 사이에 이승만을 숨게 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갈 수 있도록 도왔던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보스윅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해 감사를 표했다.

한 시간 영결 예배 후 영구는 히캄 공군기지로 향했다. 6·25전쟁 때 이승만과 함께 전장(戰場)을 다녔던 밴 플리트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 본토에서 날아와 고인의 마지막 길에 동행하겠다고 했다. 서울로 향하는 C-118 미군 특별기는 7월 21일 밤 11시 날아올랐다.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조국으로 5년 2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영구는 7월 23일 오후 3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정부는 국장보다 낮은 국민장을 권했다. 이인수씨는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했다. 이화장에서 사흘간 조문객을 맞은 후 27일 오전 10시 40분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를 한 후 오후 5시 45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수십만 시민들이 시청 앞 광장에 나와 '거인'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당시 언론은 '인파 수십만이 장장 30리(약 12㎞)에 이어져 영구 행렬을 따랐다'(조선일보 1965년 7월 28일)고 전했다. 이인수씨는 "국장 같은 가족장이었다"고 회고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옆에는 이승만 동상이 서 있다. 1985년 교민들이 세운 것이다. 동상 아래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라고 새겼다. 정작 고국 묘비에는 '건국'이란 말이 없다. 당초 묻힐 때는 비석조차 없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서양에서 묘비 없는 무덤은 죄인밖에는 없다. 이 박사가 죄인인가"라고 해서 5년 후 세운 묘비의 글이 '우남 이승만 박사의 묘'였다. 프란체스카를 합장한 후인 1998년 유족이 '건국 대통령'이라고 새긴 비석을 만들고 이를 세우려 했으나 일부 정치권이 반발해 결국 '초대 대통령'으로 바꿔 세웠다. 이인수씨는 "그 비석을 현재 비석 오른쪽 뒤편에 묻었다. 언젠가 반드시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이승만 건국 정신으로 역사 바로잡아야"

조선일보 / 하와이=이한수 기자 / 입력 : 2015.07.20 

[이승만 서거 50주기]

'숭모회' 서거 50주기 추모행사

하와이 교민 단체인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는 18일 오후 5시(이하 현지 시각) 호놀룰루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이승만 대통령 서거 50주기 추모 행사를 열었다. 김창원 회장은 인사말에서 "이승만이 없었다면 한국은 없었다. 이승만 박사의 건국 정신을 상기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진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장은 추모사에서 "1948년 8월 15일을 모든 국민이 축하하는 건국절로 삼아 이승만 박사의 건국 정신을 기려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교민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에 앞서 한인기독교회에 있는 이승만 동상에 헌화했다. 헌화식에는 건국이념보급회 주최로 이승만의 사적을 견학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대학생 20여명도 참여했다.

숭모회는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이 펼치는 통일나눔펀드 모금에도 적극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19일 오후 6시에는 하와이 주지사를 비롯한 현지 정·관계 인사를 초청해 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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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하와이 망명 안해… 여행 후 돌아가려는데 당시 정부가 귀국 막아"

조선일보 / 입력 : 2015.07.20 03:07

 

[이승만 서거 50주기]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한 것이 아닙니다. 타의에 의한 장기 체류라고 할까요. 한국 여권을 발급받아 여행을 간 전직 대통령을 당시 정부가 서거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게 막은 것이죠."

류석춘〈사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은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갈 때 2~3주 휴가를 보낸다는 생각이었다"면서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적도 없고 스스로 망명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망명이란 말은 당시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당시 과도 정부 수반 허정(외무장관 겸직)으로부터 여권을 발급받고 하와이로 여행을 떠났으나 1965년 7월 19일 서거할 때까지 정부의 귀국 불허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승만은 유학과 독립운동 기간을 포함해 모두 41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시민권을 얻은 적이 없어요. 국적은 언제나 한국이었습니다." 류 원장은 "일부 독립운동가는 활동 편의를 위해 중국 여권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승만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미국 국무성이 발급한 임시 증명서를 사용했다"면서 "미국 고위층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하와이는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세운 이승만의 사상이 숙성된 곳이다. 이승만은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정착해 1939년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25년간 활동했다. 류 원장은 "이승만은 이 기간 한인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을 벌이고 '태평양 잡지'를 발행하고 논설을 쓰며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숙성시켰다"면서 "하와이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류 원장은 18일(현지 시각)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서 '이승만과 남북한의 친일 청산'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친일 청산에서도 이승만의 남한이 김일성의 북한보다 더 철저했다고 했다. 류 원장은 "이승만 초대 내각에는 '친일파'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반면 북한에는 일본 강점기 때 도의원을 했던 초대 총리 강양욱 같은 친일 경력자가 다수 있었다"면서 "이승만의 농지 개혁은 친일 지주 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린 경제적 친일 청산이었다"고 말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체류 30년, 꿈과 恨이 밴 하와이… 그가 세웠던 '韓人학교' 자리엔 '쿨라 콜레아' 도로명만 남아…

조선일보 : 2015.07.21 

[이승만 서거 50주기] [3·끝] 건국의 산실
학교 짓고 독립운동… 그는 하와이서 대한민국 밑그림을 그렸다

1913년부터 본격 정착, 한인기숙학교 교장 지내고 잡지 만들어 세계정세 알려
전문가 "의무교육·농지개혁… 하와이 생활 때 노하우 담겨" "동포들 돈 횡령은 사실무근"

이승만 대통령 사진

하와이 호놀룰루 중부 칼리히 지역은 1950년대 개발된 개인주택 단지다. 입구에 들어서자 '쿨라 콜레아(Kula Kolea)'라는 길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하와이 말로, 영어로는 '스쿨 코리아(한국 학교)'라는 뜻이다. 이승만이 세운 학교 '한인기독학원'이 있던 곳이다. 교사(校舍)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흔적이 남았다. 지금은 칼리히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이승만은 호놀룰루 시내와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이 한적한 언덕에 1923년 부지를 마련하고 5년 전 개교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이전했다. 1947년 폐교 때까지 300여명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 땅은 1950년과 1955년 두 차례에 걸쳐 나눠 팔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보내온 부지 매각 대금을 인천에 새로 설립한 공과대학에 투입했다. 현재 인하대다. 대학 이름은 인천과 하와이에서 첫 글자를 땄다.

이승만에게 하와이는 자유로운 독립 국가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産室)이었다. 이승만과 하와이의 인연은 111년 전으로 올라간다. 처음 하와이 땅을 밟은 때는 1904년 11월 29일. 석 달 전 한성(서울)감옥에서 풀려나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던 때였다. 중간 정박지인 하와이에 하루 머무는 동안 이승만은 배에서 내려 교민 200여명을 만나 예배를 보고 연설했다.

1916년 12월 25일 여학생 기숙사 건립을 위한 땅 고르기 작업에 직접 나선 이승만(오른쪽에서 넷째)과 교포 유지들 사진
1916년 12월 25일 여학생 기숙사 건립을 위한 땅 고르기 작업에 직접 나선 이승만(오른쪽에서 넷째)과 교포 유지들. /기파랑 제공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 내리교회 교인을 비롯한 54가구 가족이 제물포항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조건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 1910년 인구조사에서 하와이 한인은 4533명으로 전체 인구 19만명 중 2.4%였다. 현재는 교민 4만명이 산다. 전체 인구는 140만명이다.

이승만은 서른여덟 살 때인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본격 정착했다. 한인단체 국민회(당시 회장 박상하)가 초청했다. 한인이 많이 사는 하와이는 독립운동 근거지로 적합했다. 이승만은 1939년 워싱턴으로 옮길 때까지 25년간 하와이를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1960년 하야 후 5년을 더하면 아흔 생애의 3분의 1인 30년을 하와이에서 지냈다. '제2의 고향'인 셈이다. 1931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하와이섬(빅 아일랜드) 힐로에 세운 동지촌 숯가마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승만의 자취는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섬에 있다.

하와이 호놀룰루 중부 칼리히 지역에 있는 ‘쿨라 콜레아(Kula Kolea)’ 표지판. 하와이 말로 ‘한국 학교’라는 뜻이다. 이승만이 세운 학교 ‘한인기독학원’이 있던 곳으로 교사(校舍)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흔적이 남았다.
하와이 호놀룰루 중부 칼리히 지역에 있는 ‘쿨라 콜레아(Kula Kolea)’ 표지판. 하와이 말로 ‘한국 학교’라는 뜻이다. 이승만이 세운 학교 ‘한인기독학원’이 있던 곳으로 교사(校舍)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흔적이 남았다. /이한수 기자
푸우누이 거리 2453번지 주택은 이승만이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해 살았던 첫 집이다. 현재는 개축을 해 그때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승만은 이 집에서 '한국교회핍박'이란 책을 썼다. 책 서문을 쓴 날짜가 1913년 3월로 되어 있어 하와이 도착 후 한 달여 만에 탈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의 경위, 미국과 영국의 여론 등을 소개했다. 이승만은 한국이 교회를 통해 서양과 관계를 맺고 교회에서 독립 사상을 배양하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일본의 탄압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통박했다.

푸우누이 집을 마주 보고 왼쪽 길로 200m쯤 올라가면 막다른 길이 나온다. 한인기독학원의 전신인 한인여학원 자리다. 지금은 오아후 컨트리클럽으로 편입됐다. 높지 않은 담 너머로 골프장 클럽하우스가 보인다. 한인여학원은 이승만이 하와이 여러 섬을 둘러보고 교민 여자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때로 본토인에게 팔려가는 일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해 세운 학교다. 마우이섬 등에서 소녀들을 데려와 처음엔 여학생 기숙사를 만들었다가 여학교로 발전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도착 후 3년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한인중앙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하와이주 청사 맞은편 펀치볼 스트리트 1133번지에는 한인기숙학교 터를 설명하는 표석이 있다. 표석 동판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기증한 2000달러를 종잣돈으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세워 1918년까지 운영했다'는 설명을 새겼다. 지난해 교민들이 세운 것이다. 여기에 한인감리교회도 함께 있었다. '코리안 컴파운드(한국 단지)'라고 불린 이곳에서 이승만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태평양 잡지'를 냈다. 태평양 잡지(1930년 이후 '태평양 주보')는 여러 차례 발행소를 옮기다가 1930년대에는 노스 킹 스트리트 동지회관에서 발행됐다.

명문 프린스턴대학 박사인 이승만의 인기와 명성은 대단했다. 하와이 지역 사회에서 미국인 박사도 드문 때였다. 1918년 하와이대학 종합대 승격 운동이 벌어질 때 서명한 지역 유지 483명 중 이승만은 유일한 박사였다. 이승만이 세운 여학교에서 배우려는 남학생 희망자도 많았다. 이승만은 1918년 남학생을 받아들이면서 8년제 남녀공학 한인기독학원으로 개교했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이호 목사)이다. 한인기독학원은 쿨라 콜레아 부지로 이전하기 전까지 5년간 현재 알리올라니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하와이에서 47년째 사는 이승만 연구자 이덕희씨는 한국 사회 일부의 '아니면 말고'식 이승만 공격에 대해 개탄했다. "이승만은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동포들에게 알리고 기금을 조성해 활동했어요. 교민들 돈을 가로채 사리사욕을 채웠다느니 하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이씨는 서거 50주기를 맞아 출간한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에서 이승만이 직접 적은 회계 수첩, 하와이 등기소에서 찾은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 내역 등을 발굴해 이를 꼼꼼히 분석했다. 이씨는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25년 동안 준비하며 얻은 노하우는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12년을 이끌며 수립한 의무교육, 농지개혁 같은 정책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하와이는 모두 여덟 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이승만은 하와이 팔도(八島)를 조선 팔도(八道)에 비유하며 독립과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을 꿈꿨다. '이 여덟 섬에 한인 아니 가 있는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 팔도라. 장차 이 속에서 대조선을 만들어 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십 년 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 되기를 기약하겠도다.'('태평양 잡지' 1914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