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5-8-25
올 3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첫 여성 강간 피의자 전모씨가 기소 직후 선임된 김정윤 국선 변호사에게 건넨 첫마디다. 변호사 선임할 돈은커녕 가족 하나 없는 외톨이에 지적 능력마저 떨어지는 전씨는 이렇게 모든 걸 체념했다. 하지만 김 변호사,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김현정 변호사는 지난 22일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다. 매달 20~30건을 새로 맡는 국선 전담 변호인의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1~2주에 한 번 전씨를 접견하고, 증거를 찾아 현장을 누비며 주말까지 헌신한 결과였다.
처음부터 불리한 사건, 승소해도 물질적으로는 더 얻을 게 없는 이 사건에 두 변호사는 왜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한 걸까. 9년 경력의 김정윤 변호사는 “나도 모르게 좀 더 이 사건에 빠져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맞다. 그는 마땅히 할 일을 했다. 하지만 이미 여론의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지 않고 할 일 제대로 해서 억울하게 옥살이할 뻔한 사람을 구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영웅적 행동이 아닐까.
두 변호사를 보며 최근 많은 이를 충격에 빠뜨렸던 ‘인분교수’ 사건이 떠올랐다. 제자에게 인분을 먹이는 등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가혹행위를 일삼은 유명 교수의 가면을 벗길 수 있었던 데는 피해자가 알바를 하던 한 식당 직원의 공이 컸다. 온몸의 구타 상처에도 불구하고 “믿기 어려울 것”이라며 말을 꺼리는 피해자를 설득해 “증거부터 잡자”며 메신저 대화를 캡처하고 대화를 녹음하는 방법을 알려줬으니 말이다. 이 직원이 만약 남의 일이라고 나 몰라라 했더라면 스스로를 “노예”라며 삶을 포기한 피해자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식당 동료 역시 영웅적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런 평범한 행동을 놓고 웬 영웅 타령이냐고 타박할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으로 인간의 선악이 환경에 의해 쉽게 휘둘린다는 걸 보여준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루시퍼 이펙트』에서 영웅적 행위의 평범성을 말한다. 자신을 희생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우리 사이의 보통 영웅 말이다.
두 사건을 통해 많은 영웅이 우리 사이에 섞여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어간다는 것도.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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