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지평선] 수저론과 희망가

바람아님 2016. 2. 7. 00:34
한국일보 2016.02.05. 20:06


설 연휴다. 귀성 행렬로 도로가 막혀도 설빔을 차려 입은 아이는 마냥 즐거워 보인다. 경기 침체로 설 보너스 봉투가 얄팍해졌어도, 설을 맞는 사람들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그래도 설이 곤혹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취업준비생이 그렇다. 서울에 그냥 있겠다고 둘러대 지만 부모나 집안 어른 뵙기가 민망해 고향에 가지 못하는 청년들이 태반이다. 그렇다고 고시원 책상머리에 앉아있어 봐야 책 내용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하고 자책하면 할수록 미래에 대한 걱정만 더하다.


▦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은 운명을 탓할 수도 있다. 수저계급론이 횡행하고 있어 자신의 처지가 더욱 서글프다. 언제 안 그런 때가 있었나 싶지만, 최악의 청년실업률이 취업 준비생의 가슴을 찌른다. 나라가 부유해졌다고 해도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과거 어느 때보다 줄어들 정도로 소득 불평등이 커진 세상이다. 사회구조가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잘난 부모를 두지 못했다고 부모 원망을 한다고 나아질 게 없다.


▦ 물론 흙수저 자조(自嘲)론만이 청년들의 마음을 쥐어뜯는 것은 아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생기는 법이다. 운명 탓만 할 것이냐는 기류도 있다. 금수저는 아무리 번쩍거려도 섭씨 1,064도면 버티지 못하고 녹아 내린다. 은수저는 961도에서 녹아버린다. 흙수저는 1,200도의 열에도 끝까지 버티며 은은한 빛을 내는, 단단하고 아름다운 자기(瓷器) 수저로 거듭난다는 웹툰 만화가 인터넷 커뮤니티 여기저기서 보인다. 무엇으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뜨거운 불 속에서 얼마나 버티느냐가 중요하단다. 사회에 아직 바로서지 못한 젊은이에게 자조(自嘲)보다 자조(自助)론이 더 필요하다.


▦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하략)’ 지난해 세상을 뜬 문병란 시인의 ‘희망가’다. 2월 한파에 귀향하지 못하는 취업준비생에게 설 선물로 주고 싶은 시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