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함정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집착하다 눈이 멀어 살길을 찾지 못한 채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이야깁니다.
세계 최초 제품을 잇따라 내놓던 일본의 자존심, 104년 역사의 샤프 주인이 대만 훙하이그룹으로 바뀌었단 소식을 접하곤 '함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샤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배곯던 아이가 세운 회사, '샤프'의 탄생
하야가와 도쿠지(早川德次)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병약해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죠. 남의 집에서 크게 된 하야가와는 구박을 당했습니다. 초등학교는 1학년만 겨우 다녔고, 8세가 되었을 땐 일을 했어야 했죠. 딱한 처지의 아이를 눈여겨본 이웃의 도움으로 취직을 합니다.
운좋게도 금속장인 밑에서 일하게 된 영민한 아이는 아이디어를 하나 냅니다. 허리띠를 매는 데 필요한 벨트 버클을 고안해낸 것이죠. '스마트 버클'이었는데, 구멍 없이도 벨트를 조여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버클을 만들면서 회사를 차렸죠. 잃어버렸던 형제도 만났습니다. 20대의 청년 하야가와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해외 기업들이 만들던 기계식 연필을 눈여겨봤죠. 곧 제작에 들어가 '샤프 펜슬'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가 일반명사처럼 쓰는 '샤프'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아내와 아이, 회사까지 잃은 불운의 사나이
20대의 하야가와는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첫번째 위기를 만납니다. 공장이 불에 타 사라졌고, 사랑스런 아내와 아이도 지진으로 잃고야 말았습니다.
한순간에 무일푼이 된 하야가와는 빚독촉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는 샤프를 만드는 기술과 제조인력을 모두 오사카에 있는 일본문구제조에 넘깁니다. 3개월간 기술이전을 위해 일한다는 서약서까지 썼을 정도였죠. 하야가와는 약속된 기간만큼 일을 하고 나와 다시 오사카에 회사를 차립니다. 이번엔 오사카의 신사이바시 상점에서 해외에서 들어온 라디오로 눈을 돌렸습니다. 거금을 들여 사온 라디오를 분해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일본에서도 시작될 거란 믿음을 갖고 라디오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졌습니다. 그의 손에서 태어난 '샤프'라디오로 일본은 첫 라디오 시험방송을 했습니다. 중국에 지점을 낼 정도로 샤프의 라디오는 해외서도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관동대지진으로 하야가와 도쿠지는 무일푼의 삶을 맞이한다.
행운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하야가와는 큰 결심을 합니다. "직원을 대규모로 자르느니, 회사를 해산하자"고 노조에 제안한 겁니다. 샤프란 이름에 '자존심'을 걸었던 직원들은 외려 반대했습니다. 샤프 최초의 '명예퇴직'이 일어났습니다. 하야가와는 짐을 싸서 나가는 직원들에게 "다시 회사가 좋아지면 꼭 고용하겠다"는 약속을 했죠.
운명의 신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비극인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샤프에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전쟁으로 라디오 수요가 늘어났던 거죠. 1951년 샤프의 매출은 수식상승했고, 하야가와는 곧 TV 개발에 뛰어듭니다.
일본 TV의 역사를 만들다
하야가와는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라디오에 이어 TV 시대가 찾아오리라 확신했던 거죠. TV 역시 NHK가 시험방송에 들어가기도 전에 개발에 성공합니다. NHK는 샤프가 만든 텔레비전으로 시험방송에 성공하죠. 1953년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샤프는 고속성장기를 맞이합니다.
컬러 TV(1960년)에 이어 세게 최초의 LCD(액정디스플레이) TV(1987년)가 탄생하게 되죠. 창업주 하야가와는 1980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샤프는 그의 정신을 잇겠다며 '온니 원(only)' 전략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어 경쟁자들이 따라오도록 하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샤프의 이런 패기는 2000년대 후반부터 위협에 시달립니다. 빠른 추격자, 삼성과 LG였습니다.
위기 인식의 실패와 궈타이밍
200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TV 시장의 변화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브라운관 TV 대신 거실과 안방엔 평평한 액정디스플레이(LCD)로 만든 대형 TV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직접 만든 LCD로 보르도 TV를 만들었죠. 2006년 가을, 삼성은 처음으로 소니와 샤프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리에 오릅니다. 이후로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경쟁자는 만만하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삼성은 삼성디스플레이를 통해 대형 LCD를 직접 만들어 세계 시장에 내다 팔았죠.LG 역시 LG디스플레이에 수조원의 돈을 연거푸 투자해 대형 LCD 시장의 강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샤프는 중소형 LCD에 집중하느라 TV 시장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사실 '화질'만 놓고보면 샤프의 기술은 자존심을 내세울 만 했던 것도 이유였죠.
경영진의 눈을 가린 건 또 있었습니다. 안방 시장에서 샤프는 TV 1위 업체였는데, 일본 정부가 보조금을 줬던 겁니다. 경쟁자들이 해외 시장 개척에 목숨을 걸 때 샤프는 자국 내 판매만으로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달콤함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보조금을 끊자 매출은 4분의 1토막으로 고꾸러졌습니다. 2012년 TV와 LCD 시장의 침체가 닥치자 일본 정부는 '재팬디스플레이'를 만듭니다. 도시바와 히타치,소니의 중소형 LCD 사업을 묶어 '규모의 경제'를 이룬 거죠. 샤프는 합류제안을 거절하고 독자 노선을 선택합니다. 대형 생산라인을 만들면 승산이 있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샤프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세계 최고의 공장주, 궈타이밍의 꿈
애플의 아이폰이 훙하이정밀의 자회사 폭스콘에서 만들어집니다. 애플이 성장하면 그의 회사 역시 크는 구조를 갖고 있었죠.
스마트폰을 살만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씩 갖게 될 정도로 시장 성장세가 주춤해지자 그는 남의 물건을 만들어 납품하기보다 자기 브랜드를 갖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샤프였죠. 샤프는 각종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이 있고, 태양광발전과 로봇기술까지 없는 게 없는 만능회사였습니다.
샤프를 손에 넣은 그는 중국이란 거대 시장에 이어 인도까지 진출한 그는 샤프를 등에 업고 세계 제패에 도전할 기세입니다. '반한파'로 알려졌지만 최태원 SK 회장이 2014년 자금난에 처해있을 때 당시 SK C&C 지분 4.9%를 사겠다며 선뜻 손을 내민 인물이기도 합니다.
SK텔레콤이 내놓은 저가 스마트폰 '루나'가 바로 궈타이밍 회장의 폭스콘이 만든다는 점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