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1909년 낙랑유적 조사, '고대사 전쟁'의 씨앗으로

바람아님 2016. 4. 6. 10:03
한겨레 2016.04.05. 19:06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④ 평양 일대 고분발굴

옛 한나라의 지방행정조직인 ‘낙랑군’은 지금 한·중 학계와 국내 강단, 재야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대사 전쟁의 뜨거운 불씨다. <사기> ‘조선열전’을 보면,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군사를 일으켜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옛 강역 곳곳에 지방행정조직인 한사군을 세우는데, 그것이 곧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이다. 기존 학계의 통설로는 한반도 북부 평안도,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았던 진번, 임둔, 현도군이 현지민들의 저항으로 불과 20~30년 만에 만주 일대로 옮겨갔고, 고조선의 핵심부인 평양 일대에 들어선 낙랑군만이 313년 미천왕에 의해 고구려 영토로 흡수될 때까지 420여년간 존속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1909년 세키노와 야쓰이가 찾아간 평양 석암리 고분의 조사 전 모습.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으로 촌부들과 목동, 소들이 무덤 주위에 보인다.
1909년 세키노와 야쓰이가 찾아간 평양 석암리 고분의 조사 전 모습.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으로 촌부들과 목동, 소들이 무덤 주위에 보인다.

야쓰이 일행은 평양 유적조사 뒤
한나라의 지배 근거로 기정사실화
이는 대체로 정설로 수용되지만
국내 재야사학자들은 부정한다
식민지배 논리를 뒷받침하려
조사내용을 왜곡·조작했다며…


한사군이 정말 한반도 북부에 있었는지, 그중에서도 특히 핵심인 낙랑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지방 일대에 있었는지, 아니면 요동, 요서에 있었는지를 따지는 위치 논란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래로 유구한 전통을 이어왔다. 이미 조선 전기 <세종실록>과 <고려사>의 지리지 편에서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다른 군들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는 추정이 제기됐고, 조선후기에는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한백겸, 정약용과 낙랑군의 요동설을 주장하는 이익이 서로 다른 논고를 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낙랑군으로 초점을 좁혀 이 행정조직의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이후 삼한과 삼국의 형성에 끼친 영향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놓고 재야, 강단사학계는 물론 강단의 문헌사, 고고학계에서 논쟁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그만큼 낙랑군 설치 전후의 역사가 고조선과 마한·진한·변한의 삼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강역, 문화적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낙랑군 논란은 20세기 초 세키노 다다시와 야쓰이 세이이치, 이마니시 류 등의 일본 학자들이 벌인 평양 일대의 낙랑계 무덤과 성벽 등 유적, 유물에 대한 고고학 조사 자료들이 텃밭이 되고 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이 유적들을 한나라가 지배한 낙랑군의 유산으로 기정사실화했고, 이런 견해가 오늘날도 국내 문헌사, 고고학계에서 대체로 정설로 수용되고 있다. 반면 국내 재야사학자들은 식민지배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왜곡과 조작을 자행했다며 일본 학자들의 조사 내용을 대부분 부정해왔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시작된 평양 부근의 낙랑 유적 조사가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를 깔고 있다는 점은 양쪽 모두 수긍하지만, 이들이 근대적 발굴 기법을 동원해 벌인 조사 내용까지 거부할 것인지, 반대로 수용한다면 어디까지 사실로 인정할 것인지가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1909년 세키노와 야쓰이가 대한제국 정부의 부탁을 받고 벌인 최초의 관 주도 고적발굴조사는 후대 한사군, 낙랑군 논란의 발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야쓰이의 비망록 컬렉션에 있는 기행엽서와 촬영일지 등의 내용을 보면, 야쓰이 일행은 그해 9월까지 경성과 개성을 조사하고, 황해도 황주를 거쳐 10월9일 밤 평양에 도착한다. 그 뒤 한 달여간 평양 일대의 고대 유적을 처음 본격적으로 발굴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벌이게 되는데, 이 조사에서 처음으로 석암리 일대의 낙랑고분을 발굴한다. 야쓰이가 당시 일본 역사지리협회에 보낸 엽서를 보면, 일행은 원래 행선지를 “금강산에 오르기 위하여 원산 방면으로 가려 했지만, 이 경우 (무려) 3주가 소요되기 때문에 생략하고 한정된 일정을 고려하여 함경, 강원 방면과 전라도 등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들이 경성, 개성, 평양, 의주 등의 서북지방 쪽 답사로를 택한 것은 1900년 앞서 조선을 답사하고 조사한 야기 쇼자부로의 경로를 대체로 따라간 인상이 짙다. 사실 19세기 말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하야시 다이스케, 나카 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등의 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논고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정복해야 할 조선’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야쓰이의 머릿속엔 한사군으로 대표되는 고대 조선의 핵심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발굴조사로 고증하려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곧장 발굴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10월10일부터 나흘간은 평양 시내에서 기자묘와 기자정전의 표석, 보통문 등을 답사하고 실측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 솔깃한 정보가 세키노와 야쓰이 앞으로 날아들었다. “평양시내 남쪽 대동강변에 오래된 고분들이 흩어져 있으니 함께 가보자”는 <평양일보> 사장 시라카와 쇼지의 제보였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