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가로운 거처

바람아님 2016. 8. 13. 07:24

(출처-조선일보 2016.08.13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한가로운 거처


한가해지자 이끼 빛깔 한결 푸르고
낮잠을 깨자 매미 소리 더 서늘하다.
쓸쓸하여 안석에 기대앉았더니
적막한 게 선방이 따로 없구나.
산수가 시름을 잊게 하는 물건이요
문장이 늙음을 물리치는 처방이군.
마음에는 담아둔 일 하나도 없어
그윽한 맛이 차 맛처럼 길고 길어라.

閑居


苔色閑來碧(태색한래벽)
蟬聲睡後凉(선성수후량)
蕭然聊隱几(소연요은궤)
寂爾卽禪房(적이즉선방)
山水忘憂物(산수망우물)
文章却老方(문장각로방)
心無關一事(심무관일사)
幽味似茶長(유미사다장)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일러스트

숙종 시대의 저명한 문인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무더운 여름 하루를 호젓하게 보냈다. 

한가로운 때에는 평소와 다른 감각이 살아난다. 

한가로워지자 이끼조차도 더 푸른 빛깔이 되고, 낮잠에서 깨자 매미 소리가 더 시원스럽게 들린다. 

할 일도 없고 찾는 이도 없어 선방처럼 집안이 적막하다. 

쓸쓸할 때는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 산과 물을 바라본다. 

남들은 술로 시름을 잊지만 내게는 산수가 망우물(忘憂物)이다. 

무료할 때는 글을 읽는다. 

남들은 불로장생을 바라 약을 먹지만 내게는 글 읽는 것이 그보다 나은 처방이다. 

오늘따라 짐스럽게 마음을 짓누르는 일이 하나도 없다. 

차 맛을 음미하듯 한가로운 맛이 호젓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