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퇴비 냄새

바람아님 2016. 9. 3. 09:57

(출처-조선일보 2016.09.03 최원규 논설위원)

꽤 오래전 어느 아파트 단지 안 초등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다. 
인근 주민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시끄러워 못살겠다며 학교 이전을 포함해 대책을 마련하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법원은 신청을 기각했는데 그 이유가 멋졌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는 자연의 소리다. 견딜 수 없으면 신청인이 이사 가기를 정중히 권한다."

▶이웃 간 분쟁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도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게 낫다. 얼굴 붉히고 싸워봐야 앙금만 남는다. 
우리 민법도 웬만하면 이웃 간에 참고 살라고 돼 있다. 
민법 기본 정신인 '상린(相隣)관계'가 그것이다. 그 대표적 조항 217조는 이렇게 쓰고 있다. 
'토지 소유자는 매연·음향·진동 등으로 이웃 생활에 고통을 주지 않게 적당한 조처를 해야 하고 
이웃도 옆집 행위가 통상적이면 받아들여야 한다.' 

[만물상] 퇴비 냄새
▶그래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시골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차를 몰고 시골길 달리다 창문을 열면 퇴비나 축사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확 밀려들 때가 있다. 
코를 막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걸 어떻게 참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악취를 계속 맡으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져 짜증과 히스테리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세종시가 지역구인 국무총리 출신 7선(選) 이해찬 의원(무소속)도 '자연의 냄새'를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작년부터 세종시 전동면에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3주 전쯤 인근 주민이 밭에 뿌린 퇴비에서 냄새가 나자 지난 18일 세종시에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국회의원도 냄새를 못 견딜 수 있고 그래서 관청에 하소연할 수 있다. 탓할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세종시 대응이 요란했다. 
행정부시장과 간부급 공무원들이 이 의원 집으로 찾아갔고 세종시는 퇴비 성분 분석까지 의뢰했다. 
당황한 주민은 흙과 섞여 있던 퇴비 15t을 모두 거둬들였다.

▶여느 귀농·귀촌자가 이런 민원을 제기했으면 세종시가 이렇게 부산을 떨었을까. 
이 의원과 이춘희 세종시장노무현 정부 때 국무총리와 행복도시건설청장으로 세종시 건설을 추진했다
국회의원이란 자리, 시장과 맺은 인연이 없었다면 공무원들이 그렇게까지 법석을 피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누리당이 '퇴비 무죄, 황제 민원 유죄'라고 비난했다는데 여기에 민심이 어느 정도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대한 자신을 낮추라.' 
어느 귀농 안내 책자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방법'으로 소개한 귀농인의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