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人文,社會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5] DNA와 셰익스피어

바람아님 2013. 8. 16. 10:22

(출처-조선일보 2009.07.13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서울대 의대 유전체의학연구소 서정선 소장 연구진은 최근 미국·영국·중국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인간 유전체(genome)의 염기서열 전모를 밝혀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했다. 세계 최초로 30억 쌍의 인간 DNA 염기서열을 해독한 미국의 인간유전체 프로젝트가 2800여명의 과학자가 동원되어 무려 13년 동안 2조7000억원의 경비를 들여 진행된 데 비해 우리 연구진은 비교도 안 되는 연구비로 불과 두 달 만에 훨씬 더 정확한 결과를 얻었다. 앞으로 3~5년이면 누구든 그저 10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자신의 유전체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어 그야말로 맞춤유전자 의학시대가 열릴 것이란다.

2004년 우리는 자연계에서 최초로 자신의 유전자가 몇 개인지를 알게 된 동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 첫 앎의 경험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우리의 유전자 수가 초파리(약 1만3000개)나 꼬마선충(1만9000개)보다는 많지만 애기장대(2만5000개)라는 식물보다도 조금 적은 2만~2만5000개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처음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 보잘것없는 생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랴? 매일 우리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쌀(벼)이 우리의 두 배 이상인 5만~6만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걸.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 개수 때문에 기죽을 이유는 없다. 실제로 포유동물들은 거의 모두 비슷한 숫자의 유전자를 지닌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 염기서열은 98.7%가 동일하고 쥐의 DNA도 인간과 거의 90%가 일치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전자 자체가 아니라 유전자의 조절 메커니즘과 조합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맥베스·리어왕·오셀로에 사용된 단어의 수를 세어보면 평균 3만1534개로 서로 얼추 비슷하다고 한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들도 the, and, I, to 등 크게 다르지 않다. 비슷한 개수의 비슷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 세 희곡이 우리에게 전혀 다른 감흥을 주는 이유는 사용된 단어들의 배열과 조합이 다르기 때문이다. 3만여 개의 단어로 쓰인 희곡이 모두 맥베스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비록 숫자는 같더라도 우리 유전체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