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박보균 칼럼] 거절의 외교드라마

바람아님 2017. 1. 4. 23:41
중앙일보 2017.01.04 20:34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어주기 힘든 조건을 단다"
히틀러의 참전 압박에 프랑코, 절묘한 거부로 맞서
한반도는 스트롱맨들 무대 지피지기 외교로 시련 돌파


국제정치는 근육질로 바뀌었다. 강대국의 스트롱 맨들이 일으킨 현상이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는 현상타파에 나섰다. 그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흔든다. 중국 주석 시진핑의 새해 메시지는 결연함이다. 그는 국익의 단호한 수호 를 다짐했다. 일본 총리 아베의 결의는 강한 나라 만들기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마초이즘은 진화한다.

스트롱 맨들의 종합 무대는 동북아다. 무대의 장식은 예측 파괴와 돌출, 변칙이다. 한국 외교는 시련기다. 역사 경험에 해법의 지혜가 있다. 세계 외교의 드라마는 돌파의 상상력을 제공한다.


 프랑스의 국경 도시 앙데(Hendaye)-. 스페인과 붙은 대서양 쪽 작은 휴양지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길’의 북쪽 출발지다. 그곳에서 20세기 외교의 극적 장면이 연출됐다. 1940년 10월 23일 앙데 기차역에서 철권 독재자들이 만났다.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스페인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다. 그해 6월 히틀러는 프랑스를 점령했다. 다음 야망은 영국 정복. 이를 위해 스페인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것이 만남의 이유였다.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큰 빚을 졌다. 스페인 내전(1936~1939.3)에서 프랑코는 이겼다. 승리는 히틀러의 원조 덕분이다. 하지만 프랑코는 냉혹한 본능을 단련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기로 작심했다. 프랑코는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그것은 의도적인 무례함이다. 교묘한 심리전이었다. 히틀러는 불쾌감을 감췄다. 둘은 플랫폼을 걸었다. 열병식도 가졌다. 히틀러는 위압과 회유로 참전을 요구했다. 하지만 점차 추궁하는 기색이었다. 프랑코의 협상 방식은 절묘했다. “거절이란 표현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들어주기 힘든 조건과 대가를 역(逆)제의한다”-.


프랑코는 엄청난 무기·식량 지원을 요구했다. 그는 히틀러를 찬양했지만 냉소도 흘렸다. 회담은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문제에서 심하게 뒤틀렸다. 프랑코는 그 땅을 스페인에 양도해 달라고 했다. 히틀러가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프랑스는 망했지만 페탱의 비시 괴뢰정부가 존재했다. 다음날 히틀러의 일정은 페탱과의 회담이다. 나치와 비시 정부의 협력 방안이 마련돼 있었다.


 회담은 7시간 만에 끝났다. 프랑코는 히틀러를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프랑코를 만나느니 이빨을 두, 세 개 뽑는 게 낫다.”(『모던 타임스』 폴 존슨) 히틀러는 41년 6월 소련을 침공한다. 프랑코는 처음에 병력 4000명을 보냈다. 하지만 정식 군대가 아닌 의용군 형태였다. 그는 끝까지 중립을 유지했다. 정치적 허영 대신 실리의 자세다.

프랑코 시대는 어둡다. 그의 파시스트 강압통치와 내전 때 잔혹행위 때문이다. 반면 그의 실용주의 외교는 돋보인다. 당시 프랑코는 약자였다. 영국은 위기에 놓였다. 편승의 이득도 컸다. 하지만 그의 판세 읽기는 히틀러와 거리두기다. 그는 세밀히 계산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냉정함이다. 스페인과 상대국의 형편·국력을 점검했다. 영국 총리 처칠의 항전의지를 분석했다. 프랑코는 결론을 내렸다. “영국은 굴복하지 않는다. 미국이 영국에 합세한다. 독일은 아직 승리하지 않았다.” 2차 대전의 결말은 프랑코의 판단대로다. 최종 승자는 영국이다. 프랑코가 참전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스페인의 운명은 분열로 갔을 것이다. 패전의 고통 속에서 쪼개졌을 것이다. 분리는 바스크와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이다.

 2017년은 ‘초(超)불확실성 시대’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패권 승부가 시작됐다. 박근혜 정권은 파탄 상태다. 외교의 대응자세는 허약해졌다.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는 위협적이다. 그는 “대륙간 탄도로케트(ICBM) 시험발사 준비 사업이 마감 단계”라고 주장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의 성주 배치는 올 9월쯤이다. 중국의 사드 반대는 집요하다. 중국의 경제보복은 늘어난다. 사드는 사활적 방어 수단이다. 한·미 동맹의 새로운 상징이다.


 중국의 사드 철회 요구는 받아 줄 수 없다. 하지만 대화의 조건은 있다. 그것은 북한의 핵 야욕 타파에 중국이 확실히 동참하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의 대북 제재는 시늉에 그쳤다. 거절의 메커니즘은 정교해야 한다. 거부는 협상기술의 핵심이다. 그 기량은 트럼프와의 주한미군 분담금 협상에 적용할 수 있다.


 앙데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는다. 팜플로나(Pamplona)가 있다. 자동차로 남쪽 1시간 거리다. 그곳은 투우와 소몰이 축제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도시다. 헤밍웨이는 투우사의 진실의 순간을 추적했다. 소의 급소를 찌르는 상황이다. 진실의 순간은 강렬한 외교 드라마를 만든다. 그것은 지피지기가 절정을 이룬 때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