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5.12.12 03:00
D에게 보낸 편지―파리
D에게 보낸 편지―파리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매번 미루거나 멈추었던 일기를 다시 쓰곤 했다. 나 같은 부류의 인간은 매번 마음속 소란들을 전부 기록하고 나야 안심을 하는데,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에 대한 지나친 의심이 자꾸만 글을 쓰게 만드는 셈이었다.
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서간문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 일기는 곧 들켜버린 마음의 형식이 된다. 내가 쓴 일기가 편지가 되는 순간, 나는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어렵게 인정하곤 했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실은 나 아닌 '당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글 속의 수렴되는 그 모든 문장과 쉼표들이 나의 연약함과 당신이라는 세계의 놀라움에 대한 것임을, 또한 그 모든 것이 사랑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일 말이다. 그것은 신비롭지만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탐사 취재의 대가이자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공동 창간자이자 프랑스 68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 사르트르가 말한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인 앙드레 고르(1923~2007)가 쓴 'D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책을 처음 읽은 5년 전, 5년이 지난 올겨울, 나는 이 책을 두 번 모두 지하철에서 서서 읽었다. 그만큼 얇은 책이었고 내 몸처럼 익숙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읽는 순간 언젠가 나 역시 이런 책을 쓰게 되리란 예감에 사로잡히는 책이 있다. 내겐 정확히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가 그런 책이었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앙드레 고르가 아내 도린에게 바친 연서다. 도린은 암과 거미막염이라는 불치병으로 30년 가까이 투병했고, 아내의 마지막을 지켰던 그는 삶의 마지막에 임박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사랑의 역사를 기술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일생을 함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정확한 사랑 고백'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우리가 만약 헤어진다면 나보다는 당신이 더 힘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척했을까요? 실은 그 반대라는 걸 털어놓지 않으려고? '(당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왜 말했을까요? (당신의)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내 몫이라고는 왜 또 말한 것일까요? 도합 열한 줄로 된 재를 나는 스무 쪽에 걸쳐 세 번 뿌려댔던 것입니다. 하찮은 세 번의 붓놀림으로 당신을 깎아내리고, 당신의 모습을 왜곡했습니다. 우리가 실제 겪은 일을 7년 후에 쓰면서 말입니다. 그 세 번의 붓놀림이 우리 삶에서 7년의 의미를 앗아갔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해온 것들이 말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죽는다면, 사람들이 도린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나는 '배반자'를 제외하고는 아내에 대해 쓴 적이 없습니다. 그 책에서 아내는 잘못 그려졌어요. 나는 존재했던 이에 대해 무엇인가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려면 아내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밖에 쓸 수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파리에서 도린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 앙드레 고르가 도린에 대해 묘사하는 말들, 가령 "나는 당신더러 '수출용인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지요. 오직 수출만 되는, 그래서 정작 영국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산물 중 하나가 당신이라는 뜻이었습니다"라는 말은 내게 도린의 매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결혼을 망설이는 그에게 도린이 직접 전하는 말 쪽이 한결 더 와닿았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평생토록 맺어진다면, 그건 둘의 인생을 함께 거는 것이며 그 결합을 갈라놓거나 훼방하는 일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란 주장 말이다.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의 기획이며, 두 사람은 그 기획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적용하며 상황에 따라 재조정해야 할 것이라는 도린의 말은, 이미 한 사람과 20년 가까이 지내온 나로서는 가슴에 담아둘 만한 말이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것들이 결국 우리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생각은 결국 경험주의와 무의미 속에 빠질 것이라 믿었던 앙드레 고르는 '이론이란 언제든 현실의 생동하는 복잡성을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도린의 반박을 뒤늦게 납득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항상 한 작품에서 쓴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을 다음 작품에서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을 인용하다가,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이유를 밝힌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이지 '말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이미 쓴 것보다 앞으로 이어서 쓸 수 있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작가였던 나는 이 문장의 뜻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였던 나는 수십년을 함께한 부부이자 동지로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내면의 갈등이 무엇이었을지, 그것 때문에 겪어야 했을 감정의 파탄이 어디까지였을지, 최악의 순간 이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작동했을 마지막 사랑의 안간힘이 무엇이었을지, 조금쯤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책 '배반자'에서 어째서 아내를 왜곡하고, 죽는 순간 해명에 대한 의무감에 시달렸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온 것 같습니다. 자신의 한쪽 면만 발달시켰고 인간으로서 무척 빈곤한 존재인 것 같았지요.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입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서간문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이때 일기는 곧 들켜버린 마음의 형식이 된다. 내가 쓴 일기가 편지가 되는 순간, 나는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어렵게 인정하곤 했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실은 나 아닌 '당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글 속의 수렴되는 그 모든 문장과 쉼표들이 나의 연약함과 당신이라는 세계의 놀라움에 대한 것임을, 또한 그 모든 것이 사랑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일 말이다. 그것은 신비롭지만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탐사 취재의 대가이자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공동 창간자이자 프랑스 68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 사르트르가 말한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인 앙드레 고르(1923~2007)가 쓴 'D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책을 처음 읽은 5년 전, 5년이 지난 올겨울, 나는 이 책을 두 번 모두 지하철에서 서서 읽었다. 그만큼 얇은 책이었고 내 몸처럼 익숙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읽는 순간 언젠가 나 역시 이런 책을 쓰게 되리란 예감에 사로잡히는 책이 있다. 내겐 정확히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가 그런 책이었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앙드레 고르가 아내 도린에게 바친 연서다. 도린은 암과 거미막염이라는 불치병으로 30년 가까이 투병했고, 아내의 마지막을 지켰던 그는 삶의 마지막에 임박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사랑의 역사를 기술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일생을 함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정확한 사랑 고백'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우리가 만약 헤어진다면 나보다는 당신이 더 힘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척했을까요? 실은 그 반대라는 걸 털어놓지 않으려고? '(당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왜 말했을까요? (당신의)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내 몫이라고는 왜 또 말한 것일까요? 도합 열한 줄로 된 재를 나는 스무 쪽에 걸쳐 세 번 뿌려댔던 것입니다. 하찮은 세 번의 붓놀림으로 당신을 깎아내리고, 당신의 모습을 왜곡했습니다. 우리가 실제 겪은 일을 7년 후에 쓰면서 말입니다. 그 세 번의 붓놀림이 우리 삶에서 7년의 의미를 앗아갔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해온 것들이 말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죽는다면, 사람들이 도린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나는 '배반자'를 제외하고는 아내에 대해 쓴 적이 없습니다. 그 책에서 아내는 잘못 그려졌어요. 나는 존재했던 이에 대해 무엇인가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려면 아내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밖에 쓸 수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파리에서 도린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 앙드레 고르가 도린에 대해 묘사하는 말들, 가령 "나는 당신더러 '수출용인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지요. 오직 수출만 되는, 그래서 정작 영국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산물 중 하나가 당신이라는 뜻이었습니다"라는 말은 내게 도린의 매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결혼을 망설이는 그에게 도린이 직접 전하는 말 쪽이 한결 더 와닿았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평생토록 맺어진다면, 그건 둘의 인생을 함께 거는 것이며 그 결합을 갈라놓거나 훼방하는 일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란 주장 말이다.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의 기획이며, 두 사람은 그 기획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적용하며 상황에 따라 재조정해야 할 것이라는 도린의 말은, 이미 한 사람과 20년 가까이 지내온 나로서는 가슴에 담아둘 만한 말이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것들이 결국 우리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생각은 결국 경험주의와 무의미 속에 빠질 것이라 믿었던 앙드레 고르는 '이론이란 언제든 현실의 생동하는 복잡성을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도린의 반박을 뒤늦게 납득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항상 한 작품에서 쓴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을 다음 작품에서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을 인용하다가,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이유를 밝힌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이지 '말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이미 쓴 것보다 앞으로 이어서 쓸 수 있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작가였던 나는 이 문장의 뜻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였던 나는 수십년을 함께한 부부이자 동지로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내면의 갈등이 무엇이었을지, 그것 때문에 겪어야 했을 감정의 파탄이 어디까지였을지, 최악의 순간 이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작동했을 마지막 사랑의 안간힘이 무엇이었을지, 조금쯤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책 '배반자'에서 어째서 아내를 왜곡하고, 죽는 순간 해명에 대한 의무감에 시달렸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온 것 같습니다. 자신의 한쪽 면만 발달시켰고 인간으로서 무척 빈곤한 존재인 것 같았지요.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입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내겐 답장을 받은 편지가 거의 없다. 그것 때문에 슬펐던 젊은 날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사랑에 빠진 내가 너무 자주, 너무 긴 편지를 보낸 탓도 컸다. '돌이킨다'는 말은 어쩌면 '과거는 변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어쩜 '과거를 돌이키는 가장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앙드레 고르는 2007년 9월 22일 집에서 아내와 동반 자살했다. 자살이 좋은 일이라 결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덧 나 역시 이해되는 죽음이 생길 만큼의 세월이 쌓였다. 답장을 받지 못한 편지는 이제 별로 슬프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 편지를 썼다는 것과, 그것을 썼던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의 말이 맞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이지, 말한 내용이 아니다.
●D에게 보낸 편지―앙드레 고르 에세이
●D에게 보낸 편지―앙드레 고르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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