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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44] 안네의 일기

바람아님 2013. 8. 27. 12:13

(출처-조선일보 2010.02.05 주경철 서울대교수·서양근대사)


'안네의 일기'는 나치의 탄압을 받던 사람들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에 처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네 프랑크의 가족들과 몇몇 지인들은 나치의 체포를 피해 암스테르담의 한 사무실의 부속건물에서 1942년 7월부터 2년 넘게 숨어 살았다. 그런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안네는 자신이 느끼는 희망과 고통, 사랑의 감정을 고스란히 일기에 기록하였다. 1944년 8월, 누군가의 고발로 이들 모두 나치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아버지 오토 프랑크만 살아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안네 자신은 베르겐-벨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영국군에 의해 해방되기 2주 전에 티푸스 감염 때문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홀로 살아남은 아버지는 예전의 은신 장소에서 안네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이를 정리하여 출판했다. 이때 그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민감한 부분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안네가 성에 눈을 뜨며 느끼게 된 내용들이나 어머니와 갈등을 빚는 내용 등을 삭제했다. 이렇게 빠진 내용들은 안네 사망 50주기를 맞아 무삭제판이 출판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의 교육 당국이 '안네의 일기'에 성적 욕구를 묘사하는 내용이 포함돼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교재 채택을 취소했다가 항의가 빗발치자 이를 다시 철회하는 소동을 빚었다. 교실에서 사용하는 텍스트에 성적인 묘사가 노골적으로 등장하면 껄끄러운 느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감수성 예민한 소녀가 사랑을 느끼고 성숙해 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차라리 교육적으로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안네의 일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그 자신이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정신분석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온 가족이 모여 뒷방에 숨어 살다가 수용소로 힘없이 끌려가는 안네 일행을 순교자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소한 무기를 준비해 가지고 있다가 그들을 체포하러 오는 나치 군인을 한두 명이라도 살해하면서 저항하는 것이 진짜 영웅의 자세라는 것이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