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自然과 動.植物

<살며 생각하며>진달래도 유비무환이거늘

바람아님 2017. 3. 17. 23:16
문화일보 2017.03.17 14:20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춘분을 앞둔 이맘때면 남녘의 야산 양지에는 이미 화사한 진달래 꽃불이 한창 일고, 한 보름 뒤엔 이곳 봄내(春川)에도 번질 것이다. 꽃은 반쯤 벌어졌을 때가 제일 예쁘다지. 화발반개 주음미취(花發半開 酒飮微醉)렷다. 반개한 꽃이 아름답듯이 술도 취기가 돌 만큼 마시면 좋다. 그게 그리 쉽지 않아 ‘바다보다 깊은 술잔’에 마구 빠져들 죽는다.

애련(愛戀)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진달래(Rhododendron mucronulatum)는 쌍떡잎식물, 진달랫과의 낙엽관목으로 그늘진 북사면(北斜面)에 무리 지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전국 어디에나 자라고 흔히 참꽃 또는 두견화라 부른다. 소싯적 이야기다. 학교 공부를 끝내고 오는 길에 궁둥이에 비파 소리 나게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앞다퉈 오른다. 서둘러 진달래꽃을 한 아름씩 꺾어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허덕허덕 꽃잎을 딴다.


참꽃을 주섬주섬 뜯어, 꾹꾹 씹어 먹을라치면 풋풋한 꽃 냄새에 입가가 보라색이 된다. 제 입술에 꽃물 든 줄은 모르고 다른 동무들만 그런 줄로 알고 배꼽을 쥔다. 보라색 립스틱을 칠한 또래 조무래기들! 핏빛 참꽃에 든 안토시아닌(花靑素·화청소) 색소가 중성에 가까운(pH 6.5∼7.5) 침(타액)과 반응해 생긴 색깔이다.


이렇게 꽃과 과일에 많은 안토시아닌은 산성에는 붉고, 알칼리성에는 푸르며, 중성에선 자주색으로 변하니 이는 리트머스 반응(성질)과 똑같다. 리트머스란 ‘리트머스이끼(litmus lichen)’에서 뽑은 진한 안토시아닌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진달래처럼 산성 식물의 꽃은 붉고, 수국 같은 알칼리성 식물은 푸르며, 중성 식물인 제비꽃(violet)은 보랏빛이다.


진달래꽃으로나마 허기를 면하면 금세 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는다. 어린이는 놀지 않곤 못 배긴다. 이제 ‘꽃술 싸움’이다. 꽃술 중에서 좀 굵은 암술을 조심스럽게 따서 거기에 침을 바른다. 끼리끼리 짝을 지어 될 수 있는 한 꽃술을 짧게 잡겠다고 지루하게 샅바 싸움을 한다. 암술을 X자로 걸고 서로 끌어당겨서 잘리는 쪽이 지는 것이다. 이긴 쪽은 희희낙락, 손가락 끝에 호호 입김을 쐬어 친구 이마에 톡 하고 야무지게 꿀밤을 먹인다.


아무튼 우리 땐 주변의 푸나무(草木·초목)가 모두 장난감이다. 설레는 놀이 자체가 과학(科學)이요, 천연스럽게 쏟아내는 모든 말들이 바로 시(詩)다. 이렇게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동심을 가져야 과학이 보이고 시심을 느끼는 법이므로 어린이는 으레 과학자요 시인인 것.


그리고 식물에 따라 꽃잎 수가 일정하니 진달래 같은 쌍떡잎식물은 꽃잎이 4와 5의 배수(倍數)이고, 붓꽃(蘭草·난초) 등의 외떡잎식물은 3의 배수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 진달래는 꽃잎이 5장이다. 그렇다면 가을의 상징 꽃인 살살이꽃(코스모스) 송이 둘레에 난 혀꽃(舌狀花·설상화)은 몇 장일까? 물론 살살이꽃은 떡잎이 둘인 쌍떡잎식물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란 암술대가 수술들을 비집고 외따로 우뚝 솟아난 것은 제꽃가루받이(自家受粉·자가수분)를 하지 않겠다는 심사로 이를 자가 불화합성(不和合性)이라 한다. 식물들은 참으로 영명하기 짝이 없다. 우리 인간이 그들에게서 근친결혼(近親結婚)이 해롭다는 것을 뒤늦게야 배웠다. 다른 하등동물들도 다르지 않다. 지렁이나 달팽이들이 난소와 정소를 다 갖는 암수한몸(雌雄同體·자웅동체)이지만 반드시 짝짓기를 해 정자를 맞바꾼다.


그렇다. 분류학의 비조(鼻祖) 칼 폰 린네는 참 꽃을 좋아했으니, 스웨덴 웁살라대 교정에 서 있는 선생 동상의 한 손에 꽃이 들려 있다. 그리고 선생은 진달래 같은 양성화(兩性花)를 보고는 “가운데 여자(암술) 하나를 두고 가에 여러 남자(수술)가 삥 둘러 에워싸고 있다”고 했다. 별 시답잖은 소리 한다 하겠지만 제대로 본 것이다. 꽃이란 식물의 생식기관이 아니던가. 동물들은 생식기를 사타구니에 끼고 있는데 녀석들은 혐오스럽게(?)도 가지 꼭대기에 오뚝 매달았다. 게다가 꽃의 암내가 꽃향기로다!


보통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진달랫과 식물(진달래·산철쭉·철쭉·영산홍)을 간단히 비교해 보자. 이들 중에서 진달래가 가장 먼저 개화하고, 진달래는 꽃눈(flower bud) 하나에 꽃송이가 1개지만, 산철쭉·철쭉·영산홍은 2∼3개씩이 들었다. 또, 진달래는 꽃이 잎보다 먼저 피지만 나머지 셋은 잎과 꽃이 거의 동시에 개화한다. 진달래·산철쭉·철쭉은 암술 1개에 수술이 죄다 10개씩이지만 영산홍은 5개다.


그리고 산철쭉은 진달래와 더불어 산자락에 자생하고, 꽃은 진달래와 매우 흡사하지만 짙은 자주색 무늬(斑點·반점)가 많으며, 꽃자루에 점액 독이 있어 먹지 못하기에 ‘개꽃’이라 한다. 그리고 철쭉은 산철쭉보다 키가 훨씬 크고, 높은 산에서 연분홍 꽃을 늦게 피우니 오뉴월에 태백산, 지리산 철쭉제가 벌어진다.


그리고 진달래와 함께 이른 봄을 찬란하게 꾸미는 산수유·목련·개나리들은 되우 준비성이 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나 할까. 올해 피울 꽃망울(꽃눈)을 지난해에 미리 만들어 겨우내 달고 있다가 이윽고 봄이 오자마자 서둘러 꽃 먼저 봉오리를 터뜨리니 말이다.